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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19 기준 최신판



창경궁에 있던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왕과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는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반면,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3년상이 아닌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었다.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경사전은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혼전이다. 인선왕후는 우의정(右議政) 장유(張維)의 딸이다. 인선왕후는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에 해당하였다. 1674년(현종 15)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경사(敬思)’로 정하고(『현종실록』 15년 3월 2일)(『현종개수실록』 15년 3월 2일), 5개월 뒤 효종의 영릉(寧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의 효종 신실(神室)에 부묘할 때까지 경사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674년 2월 24일 인선왕후가 경덕궁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자 융복전(隆福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5개월 뒤 6월 4일에 영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이틀 뒤 6월 6일에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해 둔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현종실록』 15년 6월 6일)(『현종개수실록』 15년 6월 6일). 이때 창경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경사전이다.

경사전의 위치에 대해서는 창경궁에 있었다는 내용이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열성지장(列聖誌狀)』에 실린 현종의 행장(行狀)에서 확인된다. 다만, 창경궁의 어느 전각에 마련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조선후기의 기록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경덕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은 승하한 장소를 가리켰을 가능성도 있고, 인선왕후가 일찍이 경덕궁에 이어(移御)해 있었으므로 혼전도 경덕궁에 마련한 것으로 추정했을 가능성도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경사전은 인선왕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경사전의 제사는 반우한 뒤 현종이 재우제(再虞祭)를 친히 지냈다. 영릉이 먼 곳에 있어서 혼전에서 초우제(初虞祭)를 지내지 못하고 재우제부터 지냈다. 이후 우제의 기록은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의 기록이 다르다. 『현종실록』에는 삼우제(三虞祭)와 사우제(四虞祭)는 섭행(攝行)하고 오우제(五虞祭)부터 친행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종개수실록』에는 삼우제만 섭행하고 사우제부터 친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밖에 경사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혼전에서 거행하는 일반적인 의식 절차를 밟았다.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卒哭祭)를 거쳐 연제·대상제(大祥祭)·담제 의절을 모두 거행하였다. 그 밖에 조석상식(朝夕上食), 사시(四時) 및 납(臘) 제사, 속절(俗節) 및 삭망(朔望) 제사를 지냈다. 사시는 춘·하·추·동, 납일은 동지(冬至) 후 세 번째 미일(未日), 속절은 정조(正朝)·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동지, 삭망은 초하루와 보름을 말한다.

혼전에서 거행한 의식 중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에서 내린 제사와 시호를 받고 분황(焚黃)하는 의식을 행하였다는 점이다. 인선왕후의 국상에는 청나라에서 파견한 사신이 조칙(弔勅)과 제부(祭賻)를 가져왔다. 단, 다른 왕후처럼 ‘조제(弔祭)’를 받기 위해 다른 곳에 임시로 혼전을 마련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이후 현종이 인선왕후의 국상을 주관하다가 승하하자 숙종이 뒤를 이어 남은 의식 절차를 모두 마쳤다.

1676년(숙종 2) 4월 9일 인선왕후의 신주를 경사전에서 옮겨 와서 태묘(太廟)에 부묘하였다. 따라서 경사전은 인선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674년 6월 6일부터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676년 4월 9일까지는 창경궁에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열성지장』의 기록을 따라 경사전이 창경궁에 마련되었다고 할 경우 경사전이 있었던 창경궁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종묘의궤(宗廟儀軌)』
  • 『통문관지(通文館志)』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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