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법사(廣法寺)"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2:1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광법사 |
한글표제 | 광법사 |
한자표제 | 廣法寺 |
관련어 |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나옹혜근(懶翁惠勤)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북한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이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광법사(廣法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32년 윤4월 14일 |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지은 평양 9사(寺) 중의 하나로, 평안남도 평양시대성산 구역에 위치한 절.
개설
광법사(廣法寺)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지은 9개 사찰 가운데 하나로 전한다. 고려말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원나라에 왕래할 때 머물렀던 사찰이기도 하다. 나옹 혜근은 광법사에 머물며 원나라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금자화엄경(金字華嚴經』과 금강저 등을 광법사에 소장하도록 하였다. 나옹 혜근이 입적하자 광법사 승려 각지(覺持)는 나옹의 가사 한 벌을 얻어 광법사에 봉안하였다. 조선시대 세조 때에는 광법사 승려 동봉(東峯)이 유학자들과 교류하였고, 선조 때에는 허국위(許國威)가 광법사에 들러 승려들과 담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1700년을 전후하여 사찰을 중수하였다.
연원
광법사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392년(고구려 광개토대왕 2)에 세워진 사찰이라고 한다. 기록을 통해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전래 연도는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이다. 즉 전진(前秦)의 임금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를 사신으로 보내면서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을 보냈다. 이어 374년(고구려 소수림왕 4)에는 동진(東晉)으로부터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에 왔다. 소수림왕(小獸林王)은 순도와 아도가 머물도록 초문사(肖門寺, [省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지어 순도를 초문사에 머물도록 하고 아도를 이불란사에 머물도록 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이다. 소수림왕에 이어 고국양왕(故國壤王)도 불교 장려 정책을 펼쳤으며, 광개토대왕은 즉위 2년인 392년에 9개의 사찰을 평양에 세웠다. 광법사는 바로 그 9개 사찰 가운데 하나로 세워진 것으로 전한다. 당시 창건된 9개 사찰 가운데 광법사와 금강사(金剛寺)만이 후대까지 명맥을 유지하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내용 및 변천
(1) 고려시대
광법사는 고려말 나옹 혜근이 머물던 곳으로 전한다. 나옹의 생애를 상세하게 기록한 문인 각굉의 「나옹화상행장(懶翁和尙行狀)」에서는 1358년 3월에 지공을 떠나 고려에 돌아와 평양, 동해 등지에서 설법을 하고 1360년에 오대산 상두암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나옹은 원나라에 들어가 인도 승려인 지공(指空) 화상으로부터 법을 배우고, 임제종의 평산처림(平山處林)으로부터 심법(心法)을 인가받았다. 나옹이 원나라에서 머물던 절은 북경법원사(法源寺)이고, 고려에서 공부선을 주재한 절이 개성광명사(廣明寺)이다. 나옹이 평양을 지났다는 사적과 나옹 관련 사찰이 연계되어 광법사 연기설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승려 각지(覺持)가 1358년에 광법사에서 나옹 화상을 섬겼다고 하고, 나옹 화상이 입적하자 나옹의 가사 한 벌을 광법사에 봉안하였다고 하였다.
(2) 조선시대
조선시대 들어 세조 때 승려 동봉(東峯)이 광법사에 머물며 김영유(金永濡)와 박철손(朴哲孫) 등과 시를 짓고 놀았다. 그리고 선조 때 허국위(許國威)가 평양에 도착하여 광법사를 찾아가 매우 공손히 예불(禮佛)하고, 승려들과 담화를 나누고 장삼과 고깔을 각기 하나씩 산 뒤에 은 5냥을 내어 승려들에게 나누어 주고 갔다(『선조실록』 32년 윤4월 14일). 17세기 후반 설암추붕(雪巖秋鵬)의 「평양부대성산광법사중수기(平壤府大聖山廣法寺重修記)」에는 세월이 흘러 광법사가 퇴락하자 승려 서조(瑞祖)가 앞장서서 중수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북한의 기록에는 광법사가 1700년에 화재가 나서 불타버린 것을 1727년에 중건하였고, 1760년에 보수 작업을 통해 단층 등을 새롭게 꾸몄다고 한다.
(3) 현재의 모습
광법사는 1991년에 복원되어 북한 불교의 본산이며 조선불교도연맹 본부가 있는 사찰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전소되었는데, 김일성의 교시에 의해 재건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복원된 광법사의 규모는 총 부지 면적이 28,400여㎡에 달하고 법당인 대웅전 앞에는 5층석탑이 있으며, 사찰에 들어가는 문으로 사천왕문(四天王門)과 해탈문(解脫門) 등이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설암추붕, 『설암잡저(雪巖雜著)』, 『한국불교전서』제9책, 동국대학교출판부, 1988.
- 재등충 편, 『고려사원사료집성』, 대정대학종합불교연구소, 1997.
- 조선총독부 찬집, 『조선사찰사료』, 경성인쇄소, 1911.
-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편, 『북한사찰연구』, 사찰문화연구원, 1993.
- 각굉, 「나옹화상행장(懶翁和尙行狀)」,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한국불교전서』제6책, 동국대학교출판부,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