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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왕은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대체로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경소전은 조선의 제20대 왕인 경종의 혼전이다. 경종은 숙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희빈장씨(禧嬪張氏)이다. 1724년(경종 4)에 경종이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처음에 ‘경사(敬思)’로 정했다가(『영조실록』 즉위년 9월 3일),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혼전명과 같다고 하여 ‘경소(敬昭)’로 고쳤다. 5개월 뒤 의릉(懿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 정전 제12실에 부묘할 때까지 경소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724년 8월 25일 경종이 창경궁의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하자 창덕궁의 선정전(宣政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5개월 뒤인 12월에 의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다음 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영조실록』 즉위년 12월 17일). 이때 조성한 혼전명이 경소전이다.

경소전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문헌이 없지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창경궁 안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 다른 경우가 많이 확인되어 경소전의 위치를 창경궁이라고 쉽게 단정 짓기 어렵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경소전은 경종을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의릉에서 장사지낸 그날 산릉에서 초우제(初虞祭)를 지내고 다음 날 신주를 경소전에 봉안하였다. 경소전에 신주를 봉안하면서 망전례(望殿禮)와 별전(別奠)을 거행하였다.

다음 날 경소전에서 재우제(再虞祭)를 지내는 것을 시작으로 졸곡제(卒哭祭), 연제(練祭),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까지 혼전에서 거행하는 일반적인 의식 절차를 밟았다. 다만, 재우제를 지낸 뒤 내시(內侍)가 혼백(魂帛)을 받들어 내어 혼전의 정결한 땅에 매안하였는데, 다른 혼전에 나오지 않은 절차라 주목된다.

그 밖에 조석상식(朝夕上食), 사시(四時) 및 납(臘) 제사, 속절(俗節) 및 삭망(朔望) 제사를 경소전에서 지냈다. 사시는 춘·하·추·동, 납일은 동지(冬至) 후 세 번째 미일(未日), 속절은 정조(正朝)·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동지, 삭망은 초하루와 보름을 말한다.

1726년(영조 2) 10월 12일 영조가 경소전에서 고동가제(告動駕祭)를 친히 거행한 다음 날인 13일에 경종의 신주를 태묘(太廟)에 부묘하였다. 부묘한 다음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따라서 경사전은 경종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724년 12월 17일부터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726년 10월 13일까지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을 따라 경소전이 창경궁에 마련되었다고 할 경우 경소전이 있었던 창경궁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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