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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0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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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임반역 |
한글표제 | 임반역 |
한자표제 | 林畔驛 |
상위어 | 대동도(大同道) |
동의어 | 임반관(林畔館) |
관련어 |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 선주(宣州), 선천군(宣川郡), 역관(驛館), 역도(驛道), 역로(驛路), 평안도관로찰방(平安道館路察訪), 흥화도(興化道) |
분야 | 경제/교통/육운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선천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정요근 |
폐지 시기 | 1896년(고종 33) 1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임반역(林畔驛) |
조선시대 평안도 선천에 위치했던 역.
개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임반역(林畔驛)은 선천군(宣川郡) 북쪽 25리(약 9.8㎞) 지점에 위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의주를 잇는 교통로상의 역 중에서 평안도에 위치한 역(驛)들을 ‘관(館)’이라고도 호칭했던 까닭에, 사료상에는 임반관(林畔館)으로도 다수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흥화도(興化道) 소속의 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임반역을 포함하여 한양과 의주를 잇는 교통로상의 역 중 평안도 지역에 위치한 곳들은 모두 대동도(大同道)의 소속 역으로 편성되었다.
내용 및 변천
임반역은 조선시대 선천에 위치했던 유일한 역이다. 고려시대에도 선주(宣州: 현 선천)에 위치한 역으로 확인되며, 고려 22역도 중 흥화도 소속의 역으로 편제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평안도 지역의 역도(驛道) 편성은 몇 차례의 변동이 있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한양과 의주를 잇는 교통로상의 역 중 평안도 지역에 위치한 13곳의 역관(驛館)들은 모두 평안도관로찰방(平安道館路察訪)의 관할하에 있었다. 임반역 역시 평안도관로찰방 관할하의 13곳 역관(驛館) 중 하나였다[『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얼마 지나지 않아 평안도관로찰방은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462년(세조 8) 전국적인 역도제(驛道制)의 개편 때에도 평안도 지역은 역도 편성에 변화가 없었으며, 이후에 간행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모두 대동도의 소속 역으로 기록되었다.
임반역은 교통 요지에 위치했던 까닭에, 병자호란 이후에는 선천의 읍치가 임반역으로 이동하면서, 이 지역은 선천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임반역에는 상등마(上等馬) 1마리, 중등마(中等馬) 9마리, 하등마(下等馬) 3마리, 역노(驛奴) 662명, 역비(驛婢) 486명, 관군(館軍) 142명, 고공(雇工) 240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임반역은 동쪽으로는 곽주·정주 방면, 서쪽으로는 철산·의주 방면을 연결하는 평양~의주간 간선 교통로상에 위치하였다. 임반역에서는 동쪽으로 곽주 운흥역(雲興驛), 서쪽으로 철산 차련역(車輦驛)과 연결되었다.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전국의 역들이 폐지되면서 임반역도 폐지되었다.
임반역의 위치는 현재 북한의 행정 구역으로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정요근, 「조선초기 驛路網의 전국적 재편」, 『조선시대사학보』46, 조선시대사학회, 2008.
-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한국평화문제연구소 공편, 『조선향토대백과사전』, 평화문제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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