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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05 기준 최신판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하면서 기존에 조선에 주둔시켰던 한국주차군의 변경된 명칭.

개설

1880년(고종 17) 12월 일본공사관 개설 시 6명의 일본군이 파견된 이후 일본의 병력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1883년(고종 20)에 제물포조약을 근거로 2개 중대의 공사관 수비대를 확충하고, 1885년(고종 22)에는 한성조약에 따라 1개 대대를 주둔시켰다. 나아가 청일전쟁을 치르면서 육군과 해군의 전투부대를 위시하여 각종 병참대 및 경비대가 조선에 파견되었다. 이후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은 1896년(고종 33)에는 한국주차대, 1904년(고종 41)에는 한국주차군 등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특히 1904년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으면서 강압적으로 한일의정서를 조인한 이후, 대한제국의 주요 군사거점들을 일본이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한국주차군은 1906년 7월 31일에 한국주차군사령부조례에 따라 재정비되었다. 병력은 1905년 일본에서 새로 신설한 13사단과 15사단을 주축으로 한 2개 사단 체제를 기본으로 했다. 1개 사단은 9,199명으로 2개 여단, 기병대대, 포병연대, 공병대대, 치중병대대로 구성되었다. 주차군의 2개 사단은 당시 일본군 총병력의 12% 정도로 많았다. 또한 주차군의 예산은 400만 엔이었는데 통감부 예산이 140만 엔이었음을 고려할 때 대한제국 내 의병 탄압 등 한반도 침략을 위해 진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된 이후에는 조선주차군으로 변경되었고, 1915년 이후로는 19사단과 20사단을 창설하여 2개 사단 체제를 갖추었다. 1918년부터는 조선군으로 개칭하였고 이때부터 조선군사령부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일제는 1904년부터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일본 부대들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들 부대는 1910년 이후에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독립군을 공격하거나 일본의 침략을 돕는 데 동원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군사령부에 부임한 사령관은 1904년부터 등장하였다. 1904년 3월부터 9월까지는 하라구치 겐사이[原口兼済] 중장, 9월부터 12월까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대장, 12월부터 1911년 8월까지 오쿠보 하루노[大久保春野] 대장, 8월부터 1912년 2월까지 우에다 아리사와[上田有沢] 중장, 2월부터 1915년 1월까지 안도 사다요시[安東貞美] 중장, 1월부터 1916년 8월까지 이노구치 세이고[井口省吾] 중장, 8월부터 1917년 8월까지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 중장, 8월부터 1918년 7월까지 마쓰가와 도시타네[松川敏胤] 중장, 7월부터 1920년 8월까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郎] 중장, 8월부터 1922년 11월까지 오바 지로[大庭二郎] 중장, 11월부터 1924년 8월까지 기구치 신노스케[菊池慎之助] 중장, 8월부터 1926년 3월까지 스즈키 소로쿠[鈴木荘六] 중장, 3월부터 1927년 3월까지 모리오카 슈세이[森岡守成] 대장, 3월부터 1929년 8월까지 가나야 한조[金谷範三] 중장, 8월부터 1930년 12월까지 미나미 지로[南次郎] 중장, 12월부터 1932년 5월까지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郎] 중장, 5월부터 1934년 8월까지 가와시마 요시유키[川島義之] 중장, 8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 12월부터 1938년 7월까지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중장, 7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나카무라 고타로[中村孝太郎] 대장, 7월부터 1945년 2월까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 대장 등이 역임하였다.

1921년 당시 조선군사령부는 제19사단과 20사단, 영흥만요새사령부(永興湾要塞司令部), 진해만요새사령부(鎮海湾要塞司令部), 조선헌병대 등으로 편제되었다. 1919년의 조선군사령관은 조선총독으로부터 출병의 요청을 받았을 때 이에 응해야 했다. 다만 사안이 급한 경우 조선총독의 청구가 없어도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군사령부의 위상은 조선총독부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었다.

순종도 육군기념제(陸軍記念祭) 같은 조선군의 의례적 행사가 있으면 조선군사령부에 돈을 하사하였다(『순종실록부록』 14년 2월 14일). 또한 순종이 서거했을 때는 조선군사령부에서 보병·기병·포병 등 약 5,000명을 출동시켰고, 탑동공원 안에 임시사령부본부를 두고 시내 각 요소를 엄중히 경계하는 동시에 10~20명씩 조를 짜서 시내 각처를 시위(示威)하였다.

변천

1945년 2월에는 일본이 미군과 소련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한반도에 제17방면군을 설치하였으며 그에 따라 조선군사령부도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 『매일신보(每日申報)』
  • 『동아일보(東亞日報)』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 국사편찬위원회, 『대한계년사』, 1971.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차문섭, 『조선시대 군사관계 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 宮田節子 編, 『朝鮮軍槪要史』, 不二出版社, 1989.
  • 유한철, 「日帝 韓國駐箚軍의 韓國 侵略過程과 組織」, 『한국독립운동사연구』6,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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