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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0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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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웅천현 |
한글표제 | 웅천현 |
한자표제 | 熊川縣 |
관련어 | 웅지(熊只), 웅구(熊口), 웅신(熊神), 병산(屛山), 웅산(熊山)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정요근 |
폐지 시기 | 1908년(순종 1)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웅천현(熊川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9년 2월 22일, 『문종실록』 1년 11월 22일, 『중종실록』 5년 6월 11일, 『중종실록』 16년 7월 9일, 『순종실록』 1년 9월 14일 |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웅천현(熊川縣)은 신라시대의 웅지현(熊只縣)에서 기원한다. 웅지현은 신라 경덕왕 때 웅신현(熊神縣)으로 개명되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다. 신라 경덕왕 때에는 의안군(義安郡: 현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성산구 일원)의 영현(領縣)으로 편성되었고, 고려시대에는 김주(金州: 현 경상남도 김해시 일원)의 속현(屬縣)으로 있었다. 조선 건국 이후 웅신현은 사실상 김주에 합병되었으나, 왜인(倭人)에 대한 방비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1437년(세종 19)에 옛 웅신현 자리에 웅신진을 설치하고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임명하였으며, 1451년(문종 1)에 웅천현을 신설하였다. 웅천현은 삼포왜란 직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된 적도 있었으나, 얼마 후에 웅천현으로 환원되었다. 웅천현은 1895년(고종 32)에 웅천군이 되었다가, 1908년(순종 1)에 창원군(昌原郡)에 합병되었다. 조선시대에 웅천현은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웅천현은 신라시대의 웅지현에서 기원하며, 신라 경덕왕 때 웅신현으로 개명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웅신현이라 불렸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 김주에 내속되었다. 조선 건국 후에도 웅신현은 그대로 김주에 소속되어 사실상 김주에 합병되었다. 1437년에 왜인들의 침범을 방비하기 위하여 웅신진(熊神鎭)을 설치하고 첨절제사를 두었다(『세종실록』 19년 2월 22일). 웅천현의 직접적인 기원은 이 웅신진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1451년에는 웅신진을 확대 개편하여 웅천현을 설치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문종실록』 1년 11월 22일).
조직 및 역할
웅천현의 영역은 신라 경덕왕 때 웅신현으로 불렸으며, 9주 중 양주(良州)의 관할하에 있던 의안군의 영현으로 편성되었다. 당시 웅신현에는 지방관으로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 웅신현은 김주의 속현이 되었으며, 웅신현에는 별도의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하지만 고려시대 웅신현에는 끝내 감무(監務)가 파견되지 않았던 까닭에 고려말기 이후 웅신현은 김주의 영역에 사실상 합병되었다. 조선시대 이후 왜구에 대한 방비가 중요해지면서 웅신현 지역의 중요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1437년(세종 19)에 웅신진을 설치하고 첨절제사를 두었으며, 1451년에는 웅신진을 웅천현으로 확대 개편하고 현감을 파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웅천현감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1510년(중종 5)에 삼포왜란의 발발로 인하여 웅천현의 중요성이 높아지자 웅천현을 웅천도호부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다시 웅천현으로 환원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웅천현에는 종6품의 현감과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웅천현에는 6품의 무관(武官)이 현감으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13명, 인리(人吏) 30명, 지인(知印) 13명, 사령(使令) 14명, 관노(官奴) 8명, 관비(官婢) 9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웅천현에는 종6품의 현감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 웅천현의 읍치와 관아는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일대에 위치하였다.
변천
1510년에 웅천현을 승격하여 웅천도호부로 삼고 치소를 제포(薺浦: 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로 옮겼다(『중종실록』 5년 6월 11일).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웅천도호부는 다시 웅천현으로 환원되었다. 1521년(중종 16)에 웅천현의 사례가 확인되므로(『중종실록』 16년 7월 9일), 1521년 혹은 그 이전에 웅천도호부는 웅천현으로 환원되었을 것이다. 웅천현은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웅천군이 되어 진주부(晉州府)의 관할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웅천군은 경상남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1908년에 웅천군은 창원군에 합병되었다(『순종실록』 1년 9월 14일). 참고로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지역은 조선시대 진해현(鎭海縣)과는 관련이 없고 웅천현의 영역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호구총수(戶口總數)』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