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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0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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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회덕현 |
한글표제 | 회덕현 |
한자표제 | 懷德縣 |
상위어 | 충청도(忠凊道) |
동의어 | 우술(雨述), 후천(杇淺), 비풍(比豐)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임용한 |
폐지 시기 | 1914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회덕현(懷德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현종실록』 3년 9월 23일 |
대전광역시 대덕구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회덕현(懷德縣)은 조선시대 충청도 공주목에 속한 현이다. 고려 940년(고려 태조 23)에 설치되었다. 고려에서는 감무(監務)를 파견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뒤 1413년(태종 13)에 충청도 공주목 회덕현으로 고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 15세기에 호수가 300호, 인구가 1,266명이었다. 토지는 2,688결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회덕군으로 승격하였다가, 1914년에 폐지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회덕현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우술군(雨述郡)이었다. 일명 후천(杇淺)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시대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비풍군(比豐郡)으로 고치고, 지금의 공주 지역인 웅주(熊州)에 예속시켰다. 고려가 건국하고 940년에 회덕현으로 고치면서 설립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공주에 예속시켰다가, 1172년(고려 명종 2)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 이때에 회덕감무가 회인감무(懷仁監務)를 겸임하게 하였다가, 1383년(고려 우왕 9)에 다시 분리시켰다. 조선이 건국한 뒤에도 그대로 감무를 두었으나, 1413년에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 1662년(현종 3)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분실하였다는 이유로 현을 폐지하였으나(『현종실록』 3년 9월 23일), 얼마 뒤에 다시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다. 조선후기에는 음서 출신자를 수령으로 임명하는 지역이 되었다. 18세기 통계에 의하면 관아에 좌수 1명, 별감 1명, 군관 5명, 아전 18명, 지인 9명, 사령 14명, 관노 12명, 관비 17명이 속해 있었다.
변천
조선후기에도 계속 현으로 유지되었고, 7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 의하면 편호는 2,350호, 인구는 남자 5,049명, 여자 4,926명 이었다. 토지는 밭 877결 47부 2속, 논 624결 29부 8속이었다. 1895년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국을 23부(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이때 공주부 회덕군으로 승격하였다. 1896년에 충청남도 회덕군이 되었으며, 1914년에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대전군에 합병되었다.
참고문헌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