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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1143년(인조 21)에 처음으로 진도에 지방관인 현령이 파견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09년(태종 9)에 진도현과 해남현을 합하여 해진군(海珍郡)을 만들었다. 1412년(태종 12)에 해진군을 영암의 속현(屬縣)인 옥산(玉山) 땅으로 옮겼다. 1437년(세종 19)에는 해진군을 다시 분리하여 원래대로 해남군과 진도군으로 하였다. 1455년(세조 1)에 진도군이 전라도 무장진(茂長鎭)의 우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진도군이 장흥진에 속했다. 1662년(현종 3)에 진도군이 현으로 강등하였다가 1671년(현종 12)에 다시 군으로 승격하였다. 1866년(고종 3)에는 진도군을 진도부(珍島府)로 승격하였다가 1873년(고종 10)에는 다시 진도군으로 강등하였다. 1867년(고종 4)에는 4읍과 9진을 모두 진도진(珍島鎭) 관할로 고쳤다.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진도부에 화포군(火砲軍) 100명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진도군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940년에 진도현이 가흥현(嘉興縣)과 임회현(臨淮縣)을 관할하였으며, 1018년에 진도현이 나주목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대동지지』와 『여지도서』에 따르면 1143년(인조 21)에 처음으로 진도에 지방관인 현령이 파견되었다. 1270년(고려 원종 11)에는 삼별초(三別抄)의 배중손(裵仲孫)이 용장으로 진도로 본거지를 정하여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다. 1350년(고려 충정왕 2)에 왜구의 침입을 피하기 위하여 진도 주민을 모두 내지(內地)로 옮겼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첫 번째는 월아지(月阿只)로, 두 번째는 명산(命山)으로, 세 번째는 삼촌(三寸)으로 그들을 이주시켰다. 그 뒤 80년 동안 진도에는 행정 기관을 두지 않고 해남 금산(金山)에 관부(官府)를 두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진도현의 속현이던 2현과 1향 4소가 진도현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2현은 가흥현과 임회현이고, 1향은 의신이며, 4소는 생강(生薑)·구향(仇向)·다염(茶鹽)·전포보(田浦保)이다. 같은 해에 진도현을 해남현과 합쳐 해진군(海珍郡)으로 하였다. 1412년에 다시 해진군을 영암의 속현인 옥산(玉山) 땅으로 옮겨 고을을 만들었다. 그 뒤 1437년에는 해진군을 다시 분리하여 원래대로 해남군과 진도군으로 각각 복구하였다(『세종실록』 19년 7월 3일). 그에 앞서 1433년(세종 15)에 진도에 수령을 파견할 것인지를 놓고 논의가 있었다. 이때 수령을 파견하여 외적을 막고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자는 영의정황희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세종실록』 15년 윤8월 14일). 1437년에 병조의 의견에 따라 진도를 수령에게 맡기고 만호를 겸임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9년 4월 20일).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진도군에 종4품 군수(郡守)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군수는 종4품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진도군수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군수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군수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1447년(세종 29)에 연변(沿邊)의 수령을 무재(武才)가 있는 자로 임명하고, 긴요(緊要)한 정도에 따라 무관 임명 때도 차등을 두게 하였다. 상긴(上緊)으로 분류된 진도에는 무과(武科)나 무재록(武才錄)에 올라 있는 자로 임명하기로 하였다(『세종실록』 29년 9월 4일).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종2품직 수군방어사(水軍防禦使)를 전국에 3원을 두었는데, 그중 1원을 전라도의 진도(珍島)에 두었다. 진도방어사는 1866년에 설치되었다가 1873년에 폐지되었다.

변천

1447년에 영암군의 신갈부곡이 해남현으로 이속되었고, 1448년(세종 30)에는 영암군의 옥천현과 팔마부곡, 황원현이 해남군으로 이속되었다. 이때 죽산현도 해남현으로 이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옥천은 영암의 월경지(越境地)로 남게 되었다.

1662년(현종 3)에 전패(殿牌)를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진도군이 현으로 강등되었다가(『현종개수실록』 3년 10월 7일), 1671년(현종 12)에 10년 기한이 찼기 때문에 다시 군으로 승격되었다(『현종개수실록』 12년 1월 2일).

1866년에 진도군이 진도부로 승격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집권 이후 남해안 방위력의 증강 차원에서 종4품 진도군수를 종3품 도후부사로 품계를 올리고 진도를 거진(巨鎭)으로 삼았다. 1873년에는 다시 진도군으로 강등되었다.

1439년(세종 21)에는 진도가 왜적(倭賊)의 침입로인 점을 감안하여, 원래 정한 수성군(守城軍) 20인 외에 100명을 더 추가하여 120인으로 늘리는 등 방어를 한층 강화하였다(『세종실록』 21년 4월 9일).

1455년부터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인근 고을을 익(翼)에 분속시켰다. 진도를 비롯하여 영광·함평독진(咸平獨鎭)을 전라도 무장진(茂長鎭)의 우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는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장흥도 그중 하나이다. 진도를 비롯하여 보성·강진·해남이 장흥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조선후기에는 순천거진이 전라전영(全羅前營)으로 바뀌었다. 전영(前營)의 속읍은 순천·장흥·진도·낙안·보성·강진·흥양·동복·광양·해남 10곳이며, 전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46초, 표하군(標下軍) 188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895명으로 되어 있다.

1867년에는 진도방어영(珍島防禦營)의 진관(鎭管)을 변경하였다. 즉 해남·영암·함평·영광의 네 고을과 임자도·다경포·목포·지도·남도포·어란포·금갑도·이진·마도의 9개 진을 모두 진도진 관할로 고쳤다(『고종실록』 4년 1월 2일). 1871년에 삼군부가 전라도의 각 군에 포군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진도부에 화포군 100명을 두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9일).

1895년에 8도 체제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진도군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首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진도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1906년(고종 43)에 과거 진도군의 월경지였던 삼촌면(三寸面)이 해남군에, 명산군(命山郡)이 영암군에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진도군지』, 진도군지편찬위원회,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