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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회인현(懷仁縣)은 조선시대 충청도 청주목에 속한 현이다. 고려 1383년(고려 우왕 9)에 감무를 파견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현감으로 고쳤다. 15세기에 호수는 146호, 인구는 633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12명, 진군(鎭軍) 18명, 선군(船軍) 37명이었다. 산지여서 토지는 1,146결인데, 이 가운데 논은 1/9에 불과하였다. 1914년에 보은군에 합병되어 보은군 회인면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회인현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미곡현(未谷縣)이었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매곡현(昧谷縣)으로 고쳐 연산군(燕山郡)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초에 다시 회인으로 고쳤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 청주의 임내로 삼았다. 뒤에 회덕감무가 회인감무를 겸임하게 하였다. 1383년에 회덕과 분리해서 따로 감무를 파견하였다. 1413년에 현감으로 고쳤다. 18세기에 회인은 아주 작은 현이어서 인구는 적고 부역은 많아 살기가 어려운 곳이니 지역을 확장시켜 주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영조실록』 33년 7월 16일). 그래도 독립된 현으로 유지한 이유는 외진 곳인 데다 보은에서 청주로 통하는 교통로상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다. 조선후기에는 음서 출신자를 주로 수령으로 임명하였다. 관속은 좌수 1명, 별감 1명, 군관 8명, 아전 14명, 지인 9명, 사령 11명, 관노 10명, 관비 11명이었다.

변천

1735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 의하면 18세기에 관내에 6개 면이 있었다. 호수는 964호, 인구는 남자 1,398명, 여자 1,447명이었다. 토지는 밭 987결, 논 160결이었다. 1901년(고종 38)의 『회인군양안(懷仁郡量案)』에 의하면 6개 면으로 구성되었으며, 가호는 2,424호, 토지는 977결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하였다가, 1914년에 지방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보은군에 합쳐져 회인면이 되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