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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 궁중 의례와 제사에서 아악(雅樂)·속악(俗樂)을 맡았던 궁중 음악 기관.

개설

협률과는 1895년(고종 35) 개편된 궁내부 산하 장례원의 한 과(科)로 갑오개혁 이후 각종 궁중 의례와 제사의 아악과 속악을 맡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4년부터 개화파들이 주도한 갑오개혁으로 왕실의 정치적 권한을 제한하고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궁내부가 설치되었다. 이와 함께 세조대 이래 음악 기관이었던 예조 소속의 장악원은 궁내부 산하 15개 기관의 하나가 되었다. 1895년 4월에는 궁내부 관제가 6원(院) 속사(屬司) 체제로 개편되면서, 장악원이 없어지고 장례원 소속의 봉상사(奉常司)에서 제례와 악공 관리를 담당했다. 그러나 7개월 후인, 같은 해 11월 궁내부가 7원 8사(司) 직속 형태로 개편되면서 봉상사가 독립하고 장례원 소속의 협률과(協律課)가 만들어져 제례와 음악 기관이 분리되었다. 장악원은 예(禮)와 악(樂)의 조화를 통해 덕치(德治)를 드러내고자 했던 조선시대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궁중의 음악 기관이었다. 그러나 근대화를 통해 봉상사라는 제례 기관에 통합되었다가 협률과로 독립하여 궁중 음악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조직 및 역할

협률과는 장악원의 축소된 형태로서 궁중 의례와 제사의 아악과 속악을 모두 담당했다. 1865년의 『대전회통』에 따르면 이전의 장악원 조직에 제조(提調), 정(正), 첨정(僉正), 주부(主簿), 전악(典樂), 부전악(副典樂) 등 46명의 관원들이 있었던 것에 비해 협률과 소속 관리는 주사 1명만 명시되어 있다. 갑오개혁 이후 왕실의 정치적 권한이 줄어들고 문묘 제례 외에 대부분의 제례가 폐지된 것과 함께 1895년 설치된 협률과도 이전 장악원보다 크게 축소된 형태로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협률과는 1900년까지 왕실 의례와 제사 음악을 담당했다.

변천

협률과는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1900년 교방사(敎坊司)로 이름이 바뀌었다. 협률과에서 교방사로 음악 기관의 이름이 바뀐 것은, 황제국 황실의 음악 기관에 맞게 중국 명나라 궁중에서 악무(樂舞)와 희곡을 관장했던 기관 이름을 빌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직제도 확대되어서 교방사의 관원은 제조 1명과 주사 3명으로 늘어났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용재총화(慵齋叢話)』
  • 서인화, 「19세기 장악원의 존재양상」, 『동양음악』24, 2002.
  • 이정희, 「대한제국기 장악기관의 체제」, 『공연문화연구』1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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