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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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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토산현 |
한글표제 | 토산현 |
한자표제 | 兎山縣 |
상위어 | 황해도(黃海道) |
동의어 | 오사함달(烏斯含達), 월성(月城)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강석화 |
폐지 시기 | 1913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토산현(兎山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3년 6월 23일 |
황해도 동쪽 끝에 있으며 동쪽으로 강원도 안협, 남쪽으로 경기도 장단, 서쪽으로 황해도 금천, 북쪽으로 황해도 신계와 접하는 곳에 설치되어 주민들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토산현(兎山縣)은 조선이 개창한 후인 1413년(태종 13)에 정식으로 현이 설치되었다. 조선후기 산성과 영애 지역 방어가 중시되면서 군관 직책이 늘어난 것 외에는 1913년에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읍격이나 강역에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이었으며 4세기 말 이후 고구려가 차지하였다. 통일신라시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토산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고려시대에는 1018년(고려 현종 9)에 장단현의 속현으로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직예(直隸)가 되었으며, 1062년(고려 문종 16)에 개성부(開城府)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 건국 후 1394년(태조 3)에 경기좌도에 속하였다(『태조실록』 3년 6월 23일). 1413년에 현감이 부임하였으며 황해도(풍해도)에 이속되었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었다. 조선전기에는 시위군 83명, 진군 52명, 선군 49명이 있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산성과 영애 방어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황주진관 소속이 되었고, 배치진[白峙鎭] 방어에 군병이 동원될 수 있도록 방어 체계가 재정비되어 좌수 1명, 도감 1명, 별감 2명, 서창감관(西倉監官) 1명, 칙수감관(勅需監官) 1명, 산성군기감관(山城軍器監官) 1명, 작대파총(作隊把摠) 1명, 단속초관(團束哨官) 1명, 기패관(旗牌官) 2명, 교사(敎師) 1명, 작대초관(作隊哨官) 3명, 기패관 10명, 토포관(討捕官) 10명, 아전 19명, 지인 16명, 사령 18명, 관노 7명, 관비 9명이 있었다.
변천
1895년(고종 32)에 23부제가 시행되면서 개성부 토산군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다시 황해도 토산군이 되었다. 1913년에 군이 폐지되고 신계군과 금천군에 분속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황해도(黃海道) 토산현(兎山縣)
-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黃海道) 토산(兎山)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고승희,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한국문화』38,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