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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0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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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제주목 |
한글표제 | 제주목 |
한자표제 | 濟州牧 |
상위어 | 전라도(全羅道) |
동의어 | 탐라(耽羅), 탁라(乇羅), 탐모라(耽毛羅), 동영주(東瀛州) |
관련어 | 제주군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조선 |
왕대 | 고려~조선 |
집필자 | 정성일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제주목(濟州牧)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6년 5월 6일, 『세조실록』 1년 9월 11일, 『고종실록』 1년 7월 4일, 『고종실록』 43년 9월 24일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1295년(고려 충렬왕 21)에 탐라를 제주로 고치고 목사를 파견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이른바 8도 체제를 완성하고 3년 뒤인 1416(태종 16)에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의 3읍 체제를 이루었다. 이것이 1895년(고종 32)까지 거의 그대로 이어졌다. 그 사이 1609년(광해군 1)에 3읍 8면으로 개편한다든지, 1864년(고종 1)에 정의와 대정을 각각 군으로 승격하였다가 1880년(고종 17)에 다시 환원하는 등 변화가 있었다. 1895년에 8도 체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제주목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1294년(고려 충렬왕 20)에 탐라를 제주로 고치고 목사를 파견한 기록이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1295년으로 기록되어 차이가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조선이 건국한 후 1397년(태조 6)에 제주목을 설치하였다.
1416년에 제주목과 대정현, 정의현으로 이른바 3읍 체제를 갖추었는데 제주목사겸도안무사오식의 건의로 이루어졌다. 한라산 동서를 기준으로 북쪽 지역을 제주목으로 삼고, 남쪽 지역은 다시 동서로 나누어서 동쪽을 정의현, 서쪽을 대정현으로 하는 것이었다. 제주에는 백성이 많아 소송도 잦았는데, 한라산 북쪽에만 관아가 있어서 남쪽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관아까지 왕래하는 데 불편이 컸다. 이렇게 해서 제주목사가 관할하는 3개 고을에 17개의 속현(屬縣)을 모두 편입하였고, 제주의 동서도현감(東西道縣監)이 신설한 목장을 겸임하였다(『태종실록』 16년 5월 6일).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제주에 목사·판관·교수를 1인씩 두었다. 목사 1인은 제주진의 병마수군절제사와 방어사를 겸하며, 판관 1인은 제주진의 병마수군절제도위와 교수, 감목관을 겸하였다. 역학 2원(한학 1, 왜학 1), 심약(審藥) 1인, 검률(檢律) 1인을 두어 실무를 맡게 했다.
『대전회통』에 따르면 제주는 국경 지방이자 해안 지방인 까닭에 문관과 무관을 교대로 임명하도록 규정하였다. 8도 체제가 확립되기 전에는 제주가 전라도 나주목(羅州牧)의 관할이었다. 1413년부터는 제주목사가 전라도관찰사의 지휘·감독 아래 있기는 했지만, 목사가 제주 전역을 관할하였다. 조선시대의 지방제도 원칙은 대정현감과 정의현감이 제주목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전라도관찰사의 명령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주의 특성상 제주목사가 관찰사의 권한 일부를 위임받아 제주 지역을 모두 통제했다.
제주목사는 정3품직이었다. 목사는 제주진(濟州鎭)의 병마수군절제사와 종2품 방어사를 겸하였다. 그래서 행정 차원에서는 제주목으로 불렀고, 군사 차원에서는 제주영(濟州營) 또는 방어사의 병영(兵營)이라는 뜻의 방어영(防禦營)으로 구분해서 불렀다. 각각에 소속되는 관속(官屬)이나 소유 전답과 경비도 구분되었다.
변천
1416년에 3읍 체제 도입 이후에 제주의 행정 조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만 하부 조직은 1609년(광해군 1)에 3읍 8면으로 개편되었다. 제주목과 정의현은 중·좌·우면의 각각 3면으로, 대정현은 좌·우면의 2면으로 정비되었다. 이후 조선후기를 통하여 제주목 우면이 신·구 우면으로 나뉘고, 제주목 좌면이 신·구 좌면으로 분할되는 부분 개정이 이루어지는 정도였다.
1455년(세조 1)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인근 고을을 익(翼)에 분속시켰다. 제주를 전라도 제주도(濟州道)의 중익으로 삼았으며, 좌익은 정의로 하였고, 우익은 대정으로 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860년대 이후 제주의 행정 조직에 커다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864년에는 정의현과 대정현의 수령으로 제주 출신 문관과 무관이 임용되어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것은 『대전통편』의 상피(相避)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조선후기로 오면서 이를 지키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종실록』 1년 7월 4일). 또 바다 방어의 중요성을 지적하면서 정의와 대정 두 고을의 수령 자리를 변경이력(邊境履歷)으로 인정해 주는 문제를 조정에서 논의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제주목의 정의와 대정의 고을 품계를 군수로 승격함으로써 두 현도 군으로 승격하였다. 그 뒤 이 고을의 수령은 제주목사의 관할에서 벗어나 직접 전라도관찰사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1880년(고종 17)에는 원래대로 정의현과 대정현으로 되돌리고 제주목사가 관할하도록 했는데, 두 현이 제주목사의 지휘권에서 벗어나 있는 동안 문제점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牧)과 군(郡)이 한 등급 차이밖에 나지 않아 체통이 문란해지는 등 폐단이 많아 도민의 불만이 컸다.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정의와 대정을 다시 현으로 바꾸고 예전대로 되돌렸다.
1895년에 8도 체제 폐지와 함께 제주목이 폐지되고 23부가 시행되면서 제주부가 되었다. 제주부에는 제주군을 비롯한 3개 군이 있었다. 같은 해에 감영과 안무영 등도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首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1897년(고종 34)에 전년도의 칙령을 일부 개정하였다. 이로써 제주는 부가 목으로 바뀌면서 제주목과 제주군·대정군·정의군의 1목 3군이 되었으며 모두 전라남도 소속이었다. 그리고 제주의 주사(主事)가 2인에서 3인으로 늘고, 다른 군에는 없는 향장(鄕長)이 제주에 새로 설치되었다. 이것은 제주의 특수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1906년(고종 43)에 목사를 폐지하고 부를 군으로 개정하였다(『고종실록』 43년 9월 24일).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남제주군지 1』, 남제주군, 2006.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 『제주도지』, 제주도지편찬위원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