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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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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장연현 |
한글표제 | 장연현 |
한자표제 | 長淵縣 |
상위어 | 황해도(黃海道) |
동의어 | 장담(長潭), 연강(淵康)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강석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장연현(長淵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4년 8월 21일, 『태종실록』 14년 12월 10일, 『영조실록』 40년 3월 23일 |
황해도 서쪽 지역에 있으며 북쪽으로 송화, 동쪽으로 벽성, 서쪽으로 서해, 남쪽으로 옹진과 접하는 곳에 설치되어 주민들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장연현(長淵縣)은 황해도 서쪽 끝에 있어서 서해안 방비의 핵심 지역이었다. 1623년(인조 1)에 도호부가 되었고 부사가 장산곶 이북 지역 수군 조련을 맡는 수군영장을 겸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장연(長淵) 땅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폭지군(瀑池郡) 소속이 되었다. 고려시대 1018년(고려 현종 9)에 옹진현의 속현이 되었고, 1106년(고려 예종 1)부터 감무가 파견되었다.
서해안 방비의 요충이었으므로 조선 초부터 군진으로서의 성격이 강조되었다. 1392년(태조 1)에 만호가 현의 감무를 겸하도록 하였으며, 1402년(태종 2)에 진을 설치하여 병마사가 수령을 겸하도록 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영강현(永康縣)과 합하여 연강현(淵康縣)이 되었으나(『태종실록』 14년 8월 21일), 곧 영강현에 따로 현감을 파견하여 독립시키고 다시 장연현이 되었다. 그리고 송화에 속해 있던 해안현(海安縣)을 병합하였다(『태종실록』 14년 12월 10일).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1623년에 후금과의 충돌에 대비하여 황해도 방어망을 정비하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현이 설치된 동안에는 종6품 현감이 보임되었으며, 도호부로 승격된 후에는 3품 문·무관이 교대로 임명되었다.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70명, 아전 30명, 지인 13명, 사령 20명, 군뢰 4명, 관노 2명, 관비 11명이 있었다. 1771년(영조 47)부터 장연도호부사는 수군영장을 겸하면서 장산곶 이북의 장연, 풍천, 은율, 장련, 안악 5개 읍의 수군 조련을 담당하였다.
변천
1764년(영조 40)에 둔전 농민들이 둔감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영조실록』 40년 3월 23일), 1773년(영조 49)에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재편하였을 때 해주부 장연군이 되었고, 이듬해 13도제가 시행되자 황해도 장연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황해도(黃海道) 장연현(長淵縣)
-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黃海道) 장연(長淵)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강석화,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한국문화』38,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