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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한산군(韓山郡)은 조선시대 충청도 공주목에 소속된 현이다. 고려말에 지한주사(知韓州事)가 되었고, 조선이 건국한 뒤 1413년(태종 13)에 군으로 고쳤다. 15세기에 호수가 342호, 인구가 1,607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6명, 수호군(守護軍) 5명, 선군(船軍) 206명이었다. 토지는 3,060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60%가 넘었다. 1914년에 서천군에 병합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한산군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마산현(馬山縣)이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우두성(牛頭城)을 이곳으로 추정하였다. 신라에서도 이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가림군(嘉林郡)의 속현으로 하였다. 고려초에 한산현으로 고쳤다. 1175년(고려 명종 5)에 감무를 파견하고 홍산현감무(鴻山縣監務)를 겸임하게 하였으며, 나중에 지한주사로 승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에 군으로 고쳤다.

한산은 해안고을로 고려시대부터 서해안 방어의 요지였다. 군의 서쪽에 위치한 건지산성(乾止山城)은 험한 지형에 자리 잡은 요새로서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이었던 주류성으로 추정되는 지역 중 하나이다. 한산의 모시[苧]는 최고의 특산물이었다(『예종실록』 1년 6월 29일). 많은 주민이 농업만이 아니라 모시를 직조해서 수익을 올렸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4품 군수이다. 좌수 1명, 군관 20명, 아전 30명, 지인 2명, 거인(車人) 16명, 사령 20명, 관노 9명, 관비 7명이 속해 있었다. 지인이 2명이고 다른 지역에 없는 거인을 둔 것이 특이하다.

변천

18세기에는 관내에 9개 면이 있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 의하면 가호는 3,513호, 인구는 남자가 6,108명, 여자가 5,412명이었다. 토지는 밭 1,387결, 논 2,759결이었다. 1914년에 서천군, 한산군, 비인군을 서천군으로 통합하였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한산군읍지(韓山郡邑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