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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8 기준 최신판



조선후기 경종에서 영조 초 이만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노론 내 분파의 하나.

개설

화당(花黨)은 경종 연간부터 영조 초반에 있었던 노론 내 한 분파로, 당주는 이만성(李晩成)이었다. 화당의 명칭은 이만성이 고양의 화전(花田)에 거주한 데에서 유래한다. 화당은 노론 내에서 조태채가 당주인 낙당(駱黨)과 1721년(경종 1) 왕세제 연잉군의 대리청정 문제, 영조 초반 도당록(都堂錄)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영조 초반에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숙종 초반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었다. 이후 노론 내에서 사상적 논쟁인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 즉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 간의 논쟁을 계기로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으로 나뉘어 졌는데, 이를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다시 낙론 내에서 화당(花黨)과 낙당, 파론(坡論)으로 분리되었다. 화당과 낙당의 분리에 대해 『영조실록』에서는 낙당의 당주(黨主)인 조태채가 화당의 당주인 이만성 등을 중심으로 한 사림들에게 배척 받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영조실록』 1년 6월 1일).

화당과 낙당의 대립이 본격화된 것은 경종 연간 때부터이다. 1721년(경종 1) 연잉군의 대리청정 건에 대해 화당 계열에서는 조속한 건의를 요청하였던 것에 비해, 낙당 계열에서는 신중한 자세로 접근하였다. 화당과 낙당의 대립은 경종 연간 노론 계열의 위기 속에서는 확실히 드러나지 않다가 영조가 즉위한 이후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조직 및 역할

화당의 당주는 이만성으로, 주로 노론 내 청론 계열이 여기에 속하였다. 이의현 등이 이에 해당된다.

변천

영조 즉위 직후 도당록의 권점(圈點) 문제가 드러나면서 낙당과 화당의 대립은 노골화되었다. 도당록은 조선시대 관원들이 당상관을 진출할 때 거쳐야만 하는 과정으로, 자파 세력의 확산이라는 점과 관련해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 시기 도당록 문제는 낙당의 좌의정민진원과 이관명 등이 논의하여 8명을 선발한 후 추가로 10명을 더 선발한 것으로, 여기에는 임징하·이의천이 포함되었다.

낙당 계열에서 이들을 도당록에 포함시킨 이유는 경종 연간에 화를 당한 노론 사대신을 비롯한 노론 세력의 신원과 소론의 치죄에 공이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당 계열인 대제학이의현 등은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도당록은 실력을 기준으로 정밀하게 골라 뽑아야지, 많이 취할 필요는 없다며 대립하였던 것이다.

낙당은 이후 소론이 집권하는 정미환국과 1728년(영조 4) 무신란 등을 거치면서 자체적으로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단암만록(丹巖漫錄)』
  • 이근호, 「영조대 탕평파의 국정 운영론 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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