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감영(平安監營)"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차이 없음)

2017년 12월 10일 (일) 01:58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평안도 일대를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평안감영(平安監營)은 조선시대에 평안도 지역의 행정과 군사 등 제반 업무를 총괄하던 관청으로 책임자로는 도절제사 또는 관찰사가 임명되었다. 고려시대에 평안도는 패서도(浿西道), 북계(北界), 서북면(西北面) 등으로 불리면서 서경에 거점을 두었으며, 조선이 건국한 후 1395년(태조 4)에는 평양에 감영을 설치하고 관찰사를 임명하여 서북 변경 일대를 관할하도록 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도의 명칭을 서북면에서 평안도로 바꾸고, 1895년(고종 32)에 평안도가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평안도는 고조선이 건국한 이래로 우리의 영토였으나 여러 차례 이민족의 침략을 당하면서 통치의 주체가 달라지는 부침을 겪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994년(고려 성종 13)에는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이곳에 구주(龜州)·곽주(郭州)·용주(龍州)·통주(通州)·철주(鐵州)·흥화진(興化鎭)의 강동6주(江東六州)를 설치함으로써 서북쪽 경계가 압록강에 이르렀다. 이듬해에 전국을 10도제(十道制)로 개편하면서 후고구려의 궁예(弓裔)가 분정한 패서 13진(鎭)의 명칭을 따서 패서도라 하였다. 이후 고려시대에 지방제도로 5도 양계제(兩界制)를 실시하면서 이 지역을 북계라 하였으며, 1102년(고려 숙종 7)부터는 서북면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이후에도 서북면이라 칭하다가 1413년에 평양과 안주의 지명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평안도로 개칭하고, 감영을 평양에 두고 도관찰사를 파견하였다.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였고, 고려시대에는 서경으로 수도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졌기 때문에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주목받는 곳이었다. 또 대동강과 의주로가 통과하는 곳으로 육로와 수로 교통의 요지여서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 평안도의 감영을 설치하기에 충분하였다. 관찰사는 감사(監司)라 하였으며, 지방의 우두머리라는 뜻에서 방백(方伯), 도백(道伯)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평양에서 정무를 보는 평안도관찰사는 도내 수령들을 관리 감독하면서 평안도의 행정, 사법, 군사의 전권을 가지고 통솔하였다.

조직 및 역할

평안도 일대는 고려시대에 패서도, 북계, 서북면으로 불렸다. 『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북계에는 서경과 안북도호부를 비롯해 25개 방어군(防禦郡)과 12개 진, 10개 현이 관할하에 있었다. 양계의 분도제(分道制)가 실시되어 북계는 운중도(雲中道)와 흥화도(興化道)의 2개 도로 나누고, 각 도마다 감창사(監倉使)·분도장군(分道將軍)·분대(分臺)를 두어 관할하였다. 지방관으로는 방어군에 5품 이상의 방어사 1인, 진에는 방어사 또는 7품 이상의 진장(鎭將) 1인, 현에는 역시 7품 이상의 현령(縣令) 1인을 각각 두었다. 이들을 총괄하기 위하여 3품의 병마사(兵馬使)가 파견되었다. 처음에 병마사는 상설된 외직(外職)이 아니라 비상시에 출동, 주둔하는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성격을 지녔다.

이후 1294년(고려 충렬왕 20)에 이 지역이 몽골에서 고려에 환속되면서 각 주·진에 지방관들이 다시 파견되고 병마사의 후신으로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를 두었다. 서북면도지휘사는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평양도존무사(平壤道存撫使)로 바뀌고 평양부윤을 겸하였으며, 1330년(고려 충혜왕 즉위)에는 평양도순무사(平壤道巡撫使)로 개칭되었다. 1389년(고려 공양왕 1)에 도절제사(都節制使)로 바뀌었고, 다음 해에 서북면도관찰출척사(西北面都觀察黜陟使)가 파견되어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와 평양부윤을 겸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 1395년에 처음으로 평양에 감영을 설치하고, 종2품의 평안도관찰사를 두었다. 평안도관찰사는 도내의 제반 업무를 총괄하고, 관할하에 있는 부윤·목사·부사·군수·현령·현감을 지휘 감독하였으며, 종2품의 평안도병마절도사와 정3품의 평안수군절도사, 평양부윤을 겸직하였다. 1625년(인조 3)에는 평안감사가 팔도도체찰부사(八道都體察副使)를 겸직하도록 하였고, 1630년(인조 8)에는 사도체찰부사를 겸직하였으며, 1637년(인조 15)에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군량미를 관할하는 양서관향사(兩西館餉使)를 겸직하였다. 이 시기에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이 일어났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의 외침이 있어 평안도관찰사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1685년(숙종 11)에는 양서관향사를 없애고 평안도와 황해도감사가 각기 겸임하도록 하였다.

감영에는 관찰사 이외에 종5품의 도사(都事) 1인을 두었다. 도사는 관찰사를 보좌하며, 도내의 감찰·사법·향시·감시·교생고강·전정·군정 등의 실질적인 업무를 총괄하였다. 또한 관찰사 유고시 그 임무를 대행할 뿐 아니라 관찰사가 도내를 순행할 때는 지역을 나누어 함께 순행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종6품의 교수 11명, 종9품의 훈도(訓導) 31명과 심약(審藥) 1명, 검률(檢律) 1명을 두었다. 교수는 지방 부·목·군·현의 유생을 가르치기 위해 향교에 배치하였으며, 훈도 역시 교관으로 지방 향교에서 유교를 가르쳤다.

『속대전』에는 교수와 훈도가 모두 폐지되었다. 검률은 형조에서 차송되는 무록관(無祿官)으로 법률의 해석과 적용 및 집행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다. 심약은 전의감에서 차송되는 무록관으로 감영과 병영의 의약 사무를 담당하였다.

『대전회통』에 의하면 평안도관찰사는 2부, 1대도호부, 2목, 14도호부, 12군, 11현을 관할하였다. 종2품은 평양·의주에 부윤 2명, 정3품은 영변에 대도호부사 1명, 정3품은 안주·정주에 목사 2명, 종3품은 강계·창성·성천·삭주·숙천·구성·중화·자산·선천·철산·용천·초산·삼화·함종에 도호부사 14명, 종4품은 상원·덕천·개천·가산·곽산·순천·희천·벽동·운산·박천·위원·영원에 군수 12명, 종5품은 용강·영유·증산·삼등·순안·강서에 현령 6명, 종6품은 양덕·맹산·태천·강동·은산에 현감 5명이 있었다.

변천

평안감영은 평안도의 제반 행정을 다스리는 책임자인 관찰사가 거처하는 관청으로 평양에 위치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방어사 혹은 도절제사를 두어 다스리다가 조선이 건국한 이후 1395년에 처음으로 평양에 감영을 설치하고 종2품의 평안도관찰사를 두었다. 평안이란 명칭은 1413년에 평양과 안주가 계수관(界首官)에 해당하여 두 지역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지명으로 흔히 관서지방이라고도 한다(『태종실록』 13년 10월 15일). 평안도는 서북 변방 지역으로 중국과의 교통로 역할을 담당하여 명과 청의 사신이 왕래하는 중심도로가 있었다. 평안감영에서는 사신 접대와 환송 등의 일을 전담하였다. 평안도는 고려시대에 거란과 몽골의 침입, 조선시대에 여진족과 청나라의 침입 등을 직접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관문이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왜의 침입으로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하면서 평안감영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외침의 피해가 많았던 지역이다. 그 밖에도 고려시대 묘청의 난과 조선시대 이괄의 난, 홍경래의 난 등 국내 반란도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이에 평안감영을 중심으로 적을 방어하기 위한 평안도관찰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시되어 비중 있는 인물이 책임자로 임명되곤 하였다. 1895년에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실시할 때 평안도는 평양부·의주부·강계부의 3부제로 나뉘었다가 이듬해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평안남도와 평안북도로 나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평양지(平壤誌)』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이정기, 「고려시기 양계(兩界) 병마사의 성립과 기능」, 『한국중세사연구』24,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