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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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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순천부 |
한글표제 | 순천부 |
한자표제 | 順天府 |
상위어 | 전라도(全羅道) |
동의어 | 감평(欿平), 승평(昇平), 승주(昇州), 평양(平陽), 승화(昇化) |
관련어 | 무평(武平), 사평(沙平)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정성일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순천부(順天府)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9년 9월 4일, 『연산군일기』 6년 3월 8일, 『선조실록』 16년 2월 20일, 『정조실록』 10년 2월 19일, 『정조실록』 11년 2월 2일, 『영조실록』 1년 8월 6일, 『영조실록』 2년 5월 28일, 『영조실록』 2년 9월 5일, 『세조실록』 1년 9월 11일, 『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고종실록』 8년 4월 29일 |
전라남도 순천시와 승주군 일부 지역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983년(고려 성종 2)에 설치된 12개의 목(牧) 가운데 하나가 승주목(昇州牧)이다. 1036년(고려 정종 2)에 승평군으로 하였다가, 1309년(고려 충선왕 1)에 승주목으로 승격시켰다.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다시 순천부로 강등하였다. 순천부는 부유·돌산·여수·광양현을 거느렸다. 1409년(태종 9)에 순천부가 관할해 오던 3현과 2향 3소 10부곡을 순천부에 편입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순천부가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 983년에 전국 12목 중 하나인 승주목에 외관을 파견하였다. 996년(고려 성종 15)에 새로 10도를 정할 때 연해군절도사(兗海軍節度使)를 두었다. 1032년(고려 덕종 1)에 다시 승평군으로 되돌아갔다. 1309년에 승주목으로 승격하였다가, 1310년에 순천부로 강등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이것이 이어졌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1413년(태종 13)에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가 되었으며, 그 무렵에 3현과 2향 3소 10부곡이 순천부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3현은 여수(麗水)·부유(富有)·돌산(突山)이며, 2향은 삼일포(三日浦)와 정방(正方)이다. 3소는 상이사(上伊沙)·두잉지(豆仍只)·두평(豆坪)이며, 10부곡은 가음(嘉音)·이촌(梨村)·죽청(竹靑)·율촌(栗村)·진례(進禮)·적량(赤良)·소라포(召羅浦)·하이사(下伊沙)·별량(別良)·송림(松林)이다. 이로써 그곳 주민들은 토호(土豪)나 향리(鄕吏)의 사적 지배에서 벗어나 점차 공민화(公民化)되었다. 그보다 앞서 1350년에 여수에 현령을 두었는데, 1396년에 여수현을 순천부에 편입시켰다. 이것은 고려말 여수 지역을 다스리던 여수현령오흔인(吳欣仁)이 태조이성계(李成桂)가 등극하자 역성혁명에 불복하는 뜻으로 성문을 굳게 닫고 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않은 것에 따른 조치였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순천부에 종3품 부사(府使) 1인과 종6품 교수(敎授)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순천부사는 종3품 병마첨절제사를 겸하였다. 부사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순천부는 부사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설치하였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부사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순천부사는 순천이 바다와 인접한 지역임을 감안하여 주로 무관을 임용하였다. 1447년(세종 29)에는 연변(沿邊)의 수령을 무재(武才)가 있는 자로 임명하기로 했다. 무관을 임명할 때도 그 긴요(緊要)한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게 하였다. 순천을 비롯하여 진(鎭)이 설치된 부안·옥구·무장·흥양과 상긴(上緊)으로 분류된 진도에는 무과(武科)나 무재록(武才錄)에 올라 있는 자를 임명하기로 하였다(『세종실록』 29년 9월 4일). 1500년(연산군 6)에는 문신이 아닌 무과 출신자를 임명하여 방비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순천을 비롯하여 보성·장흥·낙안·광양·강진·해남 같은 곳은 바다와 가까워 적에게 노출되기 쉬운 지역인데도 그곳 수령이 대부분 무신이 아니라는 점을 문제로 지적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6년 3월 8일). 1583년(선조 16)에는 순천을 비롯하여 장흥·영광·강진·해남의 문관 수령을 무신으로 바꾸어 임용하기로 하였다(『선조실록』 16년 2월 20일).
변천
1413년(태종 13)에 순천도호부로 개편된 뒤 순천의 읍호(邑號)가 변경된 적이 있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효종대에 순천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얼마 후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1786년(정조 10)에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는데, 역적 이태수(李泰守)가 태어난 고을이라 하여 호칭을 순천현(順天縣)으로 고쳤다(『정조실록』 10년 2월 19일). 그러나 이듬해인 1787년(정조 11)에 다시 순천부로 되돌렸다. 『대전통편』의 강상죄인연좌조(綱常罪人緣坐條)가 거주지를 기준으로 하는데도 이태수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순천부의 읍호를 내렸기에 바로잡은 것이다(『정조실록』 11년 2월 2일).
1413년에 지방 제도 변경 후에도 인접 지역을 순천과 통합하거나 분리한 적이 있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598년(선조 31)에 광양현(光陽縣)이 순천부에 편입되었다가 곧 원래대로 바뀌었다. 이는 왜구의 침략으로 피해가 커서 현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1396년(태조 3)에 여수현을 폐지한 이후 1897년(고종 34)에 여수군을 신설할 때까지 순천과 여수의 행정 구역은 세 차례의 큰 변화를 겪었다. 1696년(숙종 22), 1725년(영조 1), 1750년(영조 26)에 세 번이나 여수현의 복구와 폐지가 반복되었다. 이를 가리켜 삼복삼파(三復三罷)라 부른다. 처음에는 여수현을 복구하여 좌수사가 겸임하고 5개 면을 좌수영 관할로 했으며, 13개 면은 순천부에 속했다. 그런데 순천의 아전들이 5개 면에서 취해 오던 각종 수입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여 여수를 순천부에 편입시키자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되면 여수가 순천부와 좌수영 양쪽에 속하게 되어 한 곳의 주민이 두 기관의 운영비를 부담해야 하였기에, 여수현을 복구하고 그곳을 수사(水使)가 겸무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가 뒤를 이었다(『영조실록』 1년 8월 6일). 그런데 그때마다 1년도 가지 못해 다시 순천부에 편입되고 말았다. 여수를 순천에서 분리하면 폐단이 크므로 여수를 다시 순천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기득권을 고수하려던 순천부의 논리였다(『영조실록』 2년 5월 28일) (『영조실록』 2년 9월 5일).
1455년(세조 1)에는 내지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순천을 전라도 순천진(順天鎭)의 중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세조 3)에는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순천도 그중 하나이다. 전라도의 순천진에는 낙안·흥양·광양이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진관 체제는 그 뒤로도 조금씩 변화를 거치면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충좌위의 전부(前部)에는 장흥진관과 제주진관의 군사가 편성되었다.
1654년(효종 5)에 전국의 군사제도가 개편되었다. 이때 전라도는 5영(營)을 두고 각 군현을 배속시켰다. 조선후기에는 순천거진이 전라전영(全羅前營)으로 바뀌었다. 전영(前營)의 속읍은 순천·장흥·진도·낙안·보성·강진·흥양·동복·광양·해남 10곳이며, 전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46초, 표하군(標下軍) 188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895명으로 되어 있다.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전라도의 각 군에 포군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순천부에 별무사(別撫士) 200명과 포군 50명을 두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9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순천부가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首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순천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1896년에 돌산군이 신설되면서 순천군에 딸려 있던 섬이 그곳으로 이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승주문헌집(昇州文獻集)』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순천시사』, 순천시사편찬위원회, 1997.
- 『율촌면지』, 율촌면지 발간 추진위원회, 1998.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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