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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7 기준 최신판



1910년 9월 30일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면서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식민지 최고 권력기관.

개설

조선총독부는 1910년(순종 3) 9월 30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관제(官制)에 입각하여 설치된 식민지 최고 권력기관이다. 조선총독부는 한국통감부를 전신으로 한다. 조선총독부의 식민 지배는 시기별로 특징을 보였다. 1910년대에는 헌병경찰제도에 의한 무단정치가 실시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식민통치를 위한 물적 토대의 형성을 목표로 한 토지조사사업이 추진되었다. 1920년대에는 3·1운동의 영향으로 이른바 문화정치가 실시되었고, 경제적으로는 1926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이 실시되어 일본의 식량 사정을 완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1930년대에는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에 의해 농공병진정책이 실시되었는데, 관제 농촌계몽운동이라 할 수 있는 농촌진흥운동과 조선공업화정책이라는 조선산업개발정책이 병행적으로 추진되었다. 1940년대에는 전시 행정기구가 고도국방체제의 확립이나 임전필승체제의 완비를 위해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이를 위해 일본의 행정과 일원화시키는 행정체제 개편이 단행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총독부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면서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순종실록부록』 3년 8월 29일). 조선총독부의 설치 근거는 1910년 9월 30일 칙령 제354호로 공포된 조선총독부 관제였다(『순종실록부록』 3년 9월 30일). 이와 함께 일제는 각 소속 관서의 관제를 공포함으로써 한국을 통치할 중앙기구를 정비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통감부를 전신으로 한다. 러일전쟁 후 한국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인정받은 일본은 1905년(고종 42) 11월 17일 소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그에 따라 통감을 서울에 주차시켜 한국의 외교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관리하게 했다. 1905년 12월 21일에는 칙령 제267호로써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공포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초대 통감에 임명했다. 통감부는 폐지될 때까지 4년 9개월 동안 소위 보호정치를 통해 한국의 식민지화를 추진했다.

내용 및 변천

1. 1910년대 헌병경찰제도에 의한 무단정치(武斷政治)

1910년대 조선총독부 중앙기구는 대한제국 정부조직과 통감부 조직을 통합하고 일본내무성의 조직체계를 수용하여 변형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관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조선총독의 지위이다. 조선총독은 육해군 대장으로서 군을 통수하며, 모든 정무를 총괄했다. 또 직권으로 부령(府令)을 공포하고 일정한 형벌을 부과했으며 판임문관의 진퇴를 결정하여 군 통수권, 행정, 사법, 입법권 등 이른바 ‘종합행정권’을 가졌다. 이러한 조선총독의 지위는 태평양전쟁 발발 때까지 원칙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일본의 한국 주차 헌병대의 초대 대장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로 헌병경찰제도를 창설한 인물이다. 그는 1910년 1월 19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통감에게 헌병과 경찰을 일원적으로 통합하여 육군의 장관(將官)이 통솔함으로써 이상적인 경찰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일제는 1911년 들어 치안을 가장 불안하게 했던 의병이 거의 소멸되자 육군 병력을 집중시키는 대신에, 11월경부터 헌병 경찰을 대규모로 증원하고 분산 배치하여 헌병경찰제도를 본격화했다. 1914년 부·군·면의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할 때 헌병경찰기구도 이에 맞추어 재편성하였다. 1부(府)·군(郡) 1경찰서가 설치되었다. 그 결과 본국 정부의 재정 압박에도 불구하고 경찰기관 및 인원보다 훨씬 많은 헌병기관과 헌병대원이 행정의 다양한 업무를 집행하면서 조선인의 일상생활을 억압적으로 지배하였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농업자본가인 일본인 지주의 지대 착취 기반을 확대했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1910년 12월 말 기준 2399만 8420정보였던 전답이 1918년 말에 4342만 910정보로 약 80%가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시기의 조선총독은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였다.

2. 1920년대 문화정치의 실시와 산미증식계획

1919년 3·1운동이라는 거족적 항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1919년 8월 20일 칙령으로 ‘조선총독부 동 소속 관서 및 지방관제 개혁의 건’을 공포하고 아울러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총독이 이른바 ‘문화정치’를 천명하면서 총독부 관제는 다시 한번 크게 개정되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사이토와 함께 정무총감으로 부임한 전 내무 대신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와 그가 발탁하여 조선총독부로 전입한 일본내무성 출신 관료들이었다. 1919년 8월 내무부 학무국을 직할 학무국으로 승격하고, 독립된 소속 관서인 경무총감부를 직할 경무국으로 개편했다. 또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를 각각 재무국, 식산국(殖産局), 법무국으로 개칭했으며, 총독 관방의 총무국, 철도국, 토목국을 각각 서무부, 철도부, 토목부로 개칭했다. 그리하여 기존의 부-과 체계는 1관방 6국의 국-과 체계로 정비되었다. 이와 더불어 총독의 무관 전임제도도 철폐되었으며, 그에 의해 총독의 군 통수권도 ‘병력 사용 청구권’으로 바뀌었다.

1926년에는 산미증식계획이 실시되었는데, 이를 위한 여러 가지 관제개혁과 법령이 공포되었다. 1926년 총독부는 식산국에 두었던 토지개량과 외에 수리과와 개간과를 신설했다가, 1927년 5월 이들 과(課)를 합쳐 토지개량부를 설치했다. 한편, 총독부는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토지개량부를 새로 설치하고 따로 토지개량주식회사를 창설하여 토지개량사업을 대행시켰다. 산미증식계획에 의하면, 1926년부터 12개년간 35만 정보의 토지개량을 실시하여 472만 석의 쌀을 증산하며 139만 정보의 논에 농사개량을 실시하여 344만 석을 증산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결과 실제로 일본의 식량 사정을 호전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나, 1930년 이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 농촌 사정을 고려한 1934년 일본 정부의 요청에 따라 중단되었다. 이 시기 총독은 사이토 마코토와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였다.

3. 1930년대 농공병진정책의 실시

총독부 관제는 1932년 7월 다시 한번 크게 개정되었다. 이때에는 총독우가키가 천명한 농촌진흥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식산국을 식산국과 농림국으로 분리하고 토지개량부와 산림부를 농림국으로 통합했다. 1937년 8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이른바 ‘전시체제’에 돌입한 조선총독부는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기획부임시설치제’를 공포하여 조선 내 인적·물적 자원의 조사와 동원 계획을 총괄적으로 조율하는 기구로서 기획부를 신설했다. 1937년 설치된 일본기획원을 모방한 기획부는 전시체제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기구였다고 할 수 있다.

1931년 6월 만주사변 발발 직전에 부임한 우가키총독은, ‘농공병진’ 슬로건을 주창하며 농촌진흥운동과 당시 ‘산업개발정책’으로 불렸던 조선공업화정책을 시행했다.

1930년대 초반 내습한 공황으로 인해 한국의 농촌은 농가 경제수지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농민 무산화를 틈탄 사회주의운동의 농촌 내부로의 확산은 일제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었다. 1932년 7월 시작된 농촌진흥운동은 이러한 상황을 차단하기 위한 관제 농촌계몽운동이었다. 이와 함께 조선총독부는 체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방편으로 궁핍으로부터의 해방을 표방하면서 ‘갱생계획’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또한 자작농 창설사업이나 조선농지령 등의 사회정책적 시설을 통해 소작농이나 빈농들의 첨예화된 정치의식을 호도하려고 했다.

조선공업화정책은 우가키총독이 자신의 일본해 중심론을 조선총독의 입장에서 ‘일선만블록’ 노선으로 정리해 그 핵심고리로 위치 지운 ‘조(粗)공업지대’ 한국의 내용을 완성하기 위한 조선산업개발정책이었다. 이를 위해 우가키는 ‘자본가 우대정책’을 추진했고, 이미 일본에서 실시하고 있는 ‘중요산업통제법’이나 ‘공장법’을 한국의 경우 예외 지역을 만들어 일본 자본가들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른바 식민지 초과이윤을 보장해주고자 한 것이다. 이 시기 조선총독은 우가키와 미나미 지로[南次郞]였다.

4. 1940년대 고도국방국가체제의 확립

전시 행정기구는 1941년 11월 이른바 ‘고도국방국가체제의 확립’ 및 ‘임전필승체제의 완비’를 위해 대대적으로 개정되었다. 이에 의해 내무국을 사정국(司正局)과 후생국(厚生局)으로 개편하고, 기획부를 크게 강화했다. 그런데 같은 해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는 최대한 효율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기구 통폐합 등 ‘행정 간소화’와 ‘내·외지 행정 일원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태평양전쟁이 일본의 패전 국면으로 접어들던 1943년 11월 이른바 “결전체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총독부 관제가 마지막으로 크게 개정되었다. 그 내용은 총무국과 사정국을 총독 관방으로 통폐합하고 식산국과 농림국을 광공국과 농상국으로 개편하는 것이었다.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총독은 1942년 5월 개정된 일본의 관제에 따라서 조선총독부의 행정을 일본의 행정과 일원화시키는 조선총독부의 행정체제 개편을 단행하였다. 내·외지 행정 일원화의 관제 개정은 공식적으로는 조선총독의 자율적인 통치권을 중앙 정부에 공식적으로 예속시킨 것이었다. 1943년 12월 일본 정부가 산업행정기구의 전시동원을 위하여 군수성을 설치하고, 전시 총동원체제의 강화에 한층 박차를 가하자, 이에 호응하여 조선총독부는 산업행정기구를 오로지 전쟁 목적에 집중시키는 대규모 개혁을 단행하였다. 1945년 7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을 해체하여 조선국민의용대를 조직하고, 방공·증산·수송 작전 활동을 보조하게 하였다. 1944년 7월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마지막 총독으로 부임했다.

참고문헌

  • 고성훈 외 기획·편집, 『(한국근대사 기초자료집3) 일제강점기의 행정』, 국사편찬위원회, 2011.
  • 전상숙, 『조선총독정치 연구』, 지식산업사, 2012.
  • 신주백, 「1910년대 일제의 조선통치와 조선주둔 일본군 -‘조선군’과 헌병경찰제도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109, 한국사연구회, 2000.
  • 지수걸, 「1932~35년간의 조선농촌진흥운동 -식민지 ‘체제유지정책’으로서의 기능에 관하여」, 『한국사연구』46, 한국사연구회, 1984.
  • 홍이섭, 「나라 잃고 36년-조선총독부-」, 『한국현대사4 : 암흑의 시대』, 신구문화사, 1969(『홍이섭전집』6, 연세대학교출판부, 1994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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