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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기구|대표표제=승령부|한글표제=승령부|한자표제=承寧府|대역어=|상위어=궁내부(宮內府)|하위어=내장고(內藏庫)|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관청|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대한제국기|왕대=대한제국기|집필자=이근호|설치시기=1907년(융희 1) 윤8월 11일|폐지시기=1910년|소속관서=궁내부|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8302|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zb_10201007_003 『순종실록』 2년 1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zb_10101021_001 『순종실록』 1년 1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zb_10203016_001 『순종실록』 2년 3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zb_10207003_002 『순종실록』 2년 7월 3일], [http://sillok.history.go.kr/id/kzb_10307024_001 『순종실록』 3년 7월 24일], [http://sillok.history.go.kr/id/kzb_10111027_002 『순종실록』 즉위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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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때 황제의 음식과 의복을 비롯해 각종 물품의 관리를 전담하던 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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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태상왕(太上王)인 태조와 관련된 사무를 전담하던 관서.
  
 
=='''개설'''==
 
=='''개설'''==
  
1907년 황제의 음식이나 옷 등 일상 용품의 관리를 위해 설치한 관서이다.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에 대한 문안 등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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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정종 2) 태상왕인 태조를 위해서 설치한 관서로, 태조의 호종(扈從)이나 문안 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1405년(태종 5) 이조(吏曹)의 속아문으로 편성되었다가 1411년에 혁파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설립 경위 및 목적'''==
  
1907년 양력 8월 11일 포달(布達) 제158호 반포된 「승령부관제장어공어복어수물품급상시봉사건(承寧府官制掌御供御服御需物品及常時奉仕件)」을 근거로 황제의 음식이나 옷, 그리고 일용품의 보급·관리 등을 전담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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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6월 1일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태조가 태상왕이 되자, 세자 곧 후일 태종의 건의에 따라 태상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덕수궁(德壽宮)이라 명명하고 태조와 관련된 업무를 전담하기 위해 승령부를 세웠다. 이는 태상왕이 된 태조를 위로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ba_10206001_001 『정종실록』 2년 6월 1일]).
  
 
=='''조직 및 역할'''==
 
=='''조직 및 역할'''==
  
포달 제185호로 반포된 규정에 따르면 직제는 총관(總管) 1명은 친임관(親任官) 혹은 칙임관(勅任官) 1등으로, 부총관(副總管) 1명은 칙임관 2·3등으로, 시종장(侍從長) 1명은 칙임관 1·2등으로, 시종(侍從) 4명은 주임관(奏任官)으로, 서무과장(庶務課長) 1명은 주임관으로, 서기랑(書記郞) 6명은 판임관(判任官)으로 임명하도록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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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령부는 설치와 동시에 [[판사(判事)]]와 윤()·소윤(少尹)·판관(判官)·승(丞)·주부(注簿)의 직제가 설치되었다. 처음 판사에 우인렬(禹仁烈)이, 윤에 손흥종(孫興宗)·정용수(鄭龍壽) 등이 제수되었다. 관서의 반차(班次)는 당시 재정을 관장하던 [[삼사(三司)]]의 아래에 두었다. 승령부는 조회에 참여하였고([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02011_002 『태종실록』 2년 2월 11일]), 태조에 대한 문안([http://sillok.history.go.kr/id/kca_10112017_002 『태종실록』 1년 12월 17일])이나 호종(扈從)([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12003_002 『태종실록』 2년 12월 3일]) 등을 담당하였다.
  
승령부의 주 업무는 황제의 의복이나 음식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관리이며, 이 밖에도 황실과 관련된 인물에 대한 치제(致祭)나([http://sillok.history.go.kr/id/kzb_10201007_003 『순종실록』 2년 1월 7일]) 장례에 관련된 역할([http://sillok.history.go.kr/id/kzb_10101021_001 『순종실록』 1년 1월 21일]), 태황제의 칙유를 전유(傳諭)하는 역할([http://sillok.history.go.kr/id/kzb_10203016_001 『순종실록』 2년 3월 16일]), 황제의 배종(陪從)([http://sillok.history.go.kr/id/kzb_10207003_002 『순종실록』 2년 7월 3일]), 왕릉의 봉심(奉審)([http://sillok.history.go.kr/id/kzb_10307024_001 『순종실록』 3년 7월 24일]) 등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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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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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령부는 1403년(태종 3) 6월 관제 개편 당시 내장고(內藏庫)를 병합하였고([http://sillok.history.go.kr/id/kca_10306029_001 『태종실록』 3년 6월 29일]), 1405년 3월 육조의 서무 분장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속사(屬司)와 속아문(屬衙門)을 정비할 때에 이조(吏曹)의 속아문(屬衙門)으로 편제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503001_002 『태종실록』 5년 3월 1일]). 다시 1409년 12월 속관인 소윤 2직이 혁거되었고, 1411년 6월 관제 개편 때 [[전농시(典農寺)]]에 합쳐지면서 폐지되었다. 그리고 승령부에 속해 있던 토지와 노비 등은 모두 세자부인 경승부(敬承府)로 이관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1508029_001 『태종실록』 15년 8월 29일]).
  
승령부는 1907년 양력 11월 27일 궁내부 개정 관제 때 궁내부로 이관되면서 직제 개편이 이루어져총관(總管)이 1명으로 친임관, 부총관(副總管)이 1명, 시종장(侍從長)이 1명으로 칙임관, 시종(侍從)이 7명으로 주임관 혹은 칙임관, 이사(理事)가 1명, 전의(典醫)가 2명,장선(掌膳)이 1명으로 주임관, 주사가 6명으로 판임관으로 규정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b_10111027_002 『순종실록』 즉위년 11월 27일]). 폐지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합병되면서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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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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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7 판



조선 초 태상왕(太上王)인 태조와 관련된 사무를 전담하던 관서.

개설

1400년(정종 2) 태상왕인 태조를 위해서 설치한 관서로, 태조의 호종(扈從)이나 문안 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1405년(태종 5) 이조(吏曹)의 속아문으로 편성되었다가 1411년에 혁파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400년 6월 1일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태조가 태상왕이 되자, 세자 곧 후일 태종의 건의에 따라 태상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덕수궁(德壽宮)이라 명명하고 태조와 관련된 업무를 전담하기 위해 승령부를 세웠다. 이는 태상왕이 된 태조를 위로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정종실록』 2년 6월 1일).

조직 및 역할

승령부는 설치와 동시에 판사(判事)와 윤(尹)·소윤(少尹)·판관(判官)·승(丞)·주부(注簿)의 직제가 설치되었다. 처음 판사에 우인렬(禹仁烈)이, 윤에 손흥종(孫興宗)·정용수(鄭龍壽) 등이 제수되었다. 관서의 반차(班次)는 당시 재정을 관장하던 삼사(三司)의 아래에 두었다. 승령부는 조회에 참여하였고(『태종실록』 2년 2월 11일), 태조에 대한 문안(『태종실록』 1년 12월 17일)이나 호종(扈從)(『태종실록』 2년 12월 3일) 등을 담당하였다.

변천

승령부는 1403년(태종 3) 6월 관제 개편 당시 내장고(內藏庫)를 병합하였고(『태종실록』 3년 6월 29일), 1405년 3월 육조의 서무 분장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속사(屬司)와 속아문(屬衙門)을 정비할 때에 이조(吏曹)의 속아문(屬衙門)으로 편제되었다(『태종실록』 5년 3월 1일). 다시 1409년 12월 속관인 소윤 2직이 혁거되었고, 1411년 6월 관제 개편 때 전농시(典農寺)에 합쳐지면서 폐지되었다. 그리고 승령부에 속해 있던 토지와 노비 등은 모두 세자부인 경승부(敬承府)로 이관하였다(『태종실록』 15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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