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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6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전라도 영암군 북평면에 있던 세곡 보관 창고.

개설

이진창(梨津倉)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소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이곳은 영암군(靈巖郡) 북평면(北平面) 지역이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창고조(倉庫條)에 따르면 당시 영암군에는 사창(司倉)·진고(賑庫)·대동고(大同庫)·군기고(軍器庫)·해창(海倉)·서창(西倉)·옥천창(玉泉倉)·이진창 등의 창고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중 이진창은 영암군 읍치에서 약 120리, 즉 47㎞ 가량 떨어진 바닷가 지역에 설치되어 인근 지역의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이진창은 현재 해남 땅끝 마을과 완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진창이 해상 운송에 유리한 바닷가에 설치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기본적인 설치 목적은 전라도 남해안 지역에서 생산되는 세곡(稅穀)을 운송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38년(헌종 4) 『승정원일기』에서도 대동미(大同米)를 싣는 배 1척이 이진창에서 불에 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이진창이 전세(田稅)나 대동미를 보관하고 배로 운송하던 창고였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진창이 위치한 곳은 당시 육지와 제주도를 잇는 주요 뱃길 중 하나였다. 제주를 오고가는 수령이나 사신들이 매번 이곳을 경유하면서 이진창은 이들이 숙식하는 중간 기착지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조직 및 역할

『정조실록』에 따르면 제주도 세 고을의 수령과 사신(使臣)이 왕래할 적에 강진·해남·영암이 도회(都會)를 나누어 정해서 각각 1년씩 돌아가면서 이들을 응대하였다. 그런데 사신이 출입할 때에는 매번 영암의 고달도(古達島)에서 바람을 기다리기 때문에 영암에 소재한 이진창에 육방(六房)을 설치하여 접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접대 장소인 이진창이 영암에 위치하여 강진이나 해남에서 도회를 맡은 해에는 먼 길을 와서 접대를 해야 하므로 큰 폐단이 되고 있었다. 한편, 영암 고달도는 길목으로 늘 사신을 응대해야 했으므로 영암이 도회를 맡은 해가 아니더라도 섬 백성들이 받는 폐단은 마찬가지였다. 이에 호남위유사(湖南慰諭使)서영보(徐榮輔)가 별단(別單)을 올려 영암이 도회를 맡는 해에는 종전대로 고달도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강진이 도회를 맡는 해에는 남당포(南塘浦), 해남이 맡는 해에는 관두포(館頭浦)에서 바람을 기다리게 할 것을 제안하였다(『정조실록』 18년 12월 25일). 이 기사의 내용으로 볼 때 이진창은 제주로 가는 수령이나 사신들이 배를 타기 위하여 바람을 기다리는 동안 이들을 접대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진창에는 일반 군현(郡縣)의 관아와 같이 육방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이진창이 사신 접대나 세곡 운송뿐 아니라 다양한 행정적인 업무도 함께 처리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여지도서(輿地圖書)』
  • 『해동지도(海東地圖)』
  • 『대동지지(大東地志)』
  • 『영암읍지(靈巖邑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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