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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부산진 초량항에 설치된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교역을 위한 공관.

개설

왜관은 좁은 의미로는 1409년(태종 7)부터 1872년(고종 9)까지 조선에 설치되어 있던 일본인 사절을 위한 접대 시설인 객관(客館)이며, 넓은 의미로는 객관을 포함하여 왜관 주변에 퍼져 있는 일본인을 위한 거주 구역을 뜻한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곳의 왜관이 있었는데, 한양의 왜관은 동평관(東平館)이라 하였으며 부산의 왜관은 절영도왜관에서 두모포왜관을 거쳐 초량왜관으로 이관하면서 변화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일본에서 도항해 오는 왜인들의 처리와 극심했던 왜구의 침입을 저지하려는 목적과 일본과의 교린 정책에 입각해 왜관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왜관이 폐쇄되어 기능을 상실하면서 또다시 왜구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국교를 1607년(선조 40)에 재개하였다.

조선은 국교 재개를 위한 강화교섭이 있었던 1601년(선조 34)부터 1607년까지 부산의 절영도에 임시 왜관을 설립하고 강화교섭사절단을 맞이하였다. 정식 국교 수립 이후인 1607년에는 정식으로 두모포에 왜관을 설치하였다. 1609년(선조 42)에는 한양의 동평관이 폐쇄되면서 양국의 외교 업무와 통상무역은 부산의 두모포왜관으로 집중되었다. 하지만 두모포는 설치 당시부터 수심이 얕고 장소가 협소하며 배를 정박하기에는 부적절한 곳이었다. 초량왜관은 1673년(현종 14) 일본의 쓰시마 번에서 두모포에 있던 왜관을 부산진성(釜山鎭城)으로 옮겨 달라는 요청을 해옴에 따라 이관 설치되었다. 이로써 17세기 후반부터 약 200여 년간 왜관은 조·일 간 외교와 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초량왜관은 임진왜란 이전 부산포·제포·염포에 설치되었던 삼포왜관(三浦倭館)에서 기원하며 왜구를 회유할 목적에서 설치한 객관이다. 관수 이하의 역원에게는 식량과 연료 등의 명목으로 체재비가 지급되었다. 초량왜관은 건설과 유지 모두 조선의 경비로 충당하였고, 쓰시마 번은 관례상 그 사용권을 인정받은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왜관은 조선과 일본 간의 유일한 통로로 정치·외교적 문제를 조율하고 협상하는 창구뿐 아니라 인적·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변천

1872년(고종 9) 조선과 외교를 맺으려는 일본 외무성이 강제로 초량왜관을 무단 접수하면서 이후 왜관의 기능이 일본 공사관 체제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 손승철, 『조선시대 한일관계사연구-교린관계의 허와 실』, 경인문화사, 2006.
  • 이훈, 『외교문서로 본 조선과 일본의 의사소통』, 경인문화사, 2011.
  • 김용욱, 「부산왜관고」, 『한일문화』 1-2, 부산대학교 한일문화연구소, 1962.
  • 김강일, 「조선후기 倭館의 운영실태에 관한 연구」, 강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 장순순, 「조선시대 왜관변천사 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 정예정, 「초량왜관의 造營에 관한 연구」,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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