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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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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완론 |
한글표제 | 완론 |
한자표제 | 緩論 |
관련어 | 준론(峻論), 완소(緩少) |
분야 | 정치/정치운영/정쟁·정론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완론(緩論)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현종실록』 5년 윤6월 12일, 『영조실록』 7년 10월 26일 |
정치 사안에 대해서 부드럽고 완만한 논의 또는 그러한 입장을 보이는 정파.
개설
완론(緩論)이란 특정한 정치 사안이나 문제에 대한 부드럽거나 완만한 논의 또는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던 정파(政派)를 지칭한다. 조선시대 붕당 형성 이후 완론은 기본적으로 붕당의 의리보다는 붕당 세력을 조정하여 화합하려고 하던 정치 집단이다. 탕평론이 대두하면서 완론은 탕평론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을 보인다. 반대되는 용어는 준론(峻論)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동인·서인이 분당된 이후 주로 완론과 준론으로 입장을 나누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완론은 심지어는 역적을 비호하는 논의로 지목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6년 3월 3일]. 준론이 특정 당파의 정치 의리를 고집하는 반면 완론은 붕당 세력 간의 조정을 급선무로 하였다(『현종실록』 5년 윤6월 12일).
조직 및 역할
경종 연간 신임옥사를 거치며 집권 세력이었던 소론은 노론의 처리 문제와 남인의 진용(進用) 문제를 둘러싸고 입장이 나뉘었다. 노론에 대해 강경한 처벌 입장을 취하던 세력들이 급소(急少)로, 노론의 처벌 대상을 주모자로 한정하자는 주장과 함께 급소의 맹주인 김일경(金一鏡)에 대해 비판적인 인사들이 완소로 분류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결 구도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던 세력들이 준소로 분류되었다. 완론 계열인 완소에는 조문명·송인명·서명균·박사수 등이 포함되었다[『경종수정실록』 2년 5월 3일].
영조 즉위 직후 노론이 집권하면서, 소론에 대한 토역(討逆)으로 정국이 혼란하자, 영조는 노론 세력을 축출하고 소론이 정국을 주도하는 정미환국(丁未換局)을 단행하였다. 그러면서 소론 세력 내 완론 계열인 조문명과 송인명 등을 발탁하여 중용하였고, 노론 세력 내의 완론인 홍치중이나 김흥경, 김재로 등을 함께 발탁하여 탕평파를 육성하였다. 따라서 영조대 탕평파는 완론 계열에서 주도하였다. 이들 완론들은 붕당론에서 붕당을 군자당과 소인당으로 구분하는 방식을 부정하고, 의리를 조정하고 인재를 고루 뽑아 조화를 이루는[調劑保合] 탕평 정책을 추진하였다.
변천
탕평파는 점차 탕당(蕩黨) 또는 탕평당(蕩平黨)이라는 불리며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었다. 1732년(영조 8)경에는 조현명과 송인명의 독주를 견제하는 ‘조송건곤(趙宋乾坤)’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영조실록』 8년 9월 26일]. 또한 1731년에 이미 탕당의 등장으로 풍문과 절의가 모두 사라져 사람들이 아름다운 관직과 좋은 작위만을 바란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등 이들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영조실록』 7년 10월 26일).
완론 중심의 탕평당은 영조대 후반 척신 계열로 대체되었으며, 이에 대한 비판으로 준론을 주도하는 청명당이 결성되었다. 정조 즉위 이후 완론 계열은 약화되고 준론이 정치를 주도하였다.
참고문헌
-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박광용 교수의 시대사 읽기』, 푸른역사, 1998.
- 박광용, 「영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정비」, 『(신편)한국사』32, 국사편찬위원회, 1997.
- 정만조, 「숙종 후반~영조초의 정국과 밀암 이재(李栽)의 정치론」, 『밀암 이재의 연구』,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2001.
- 정만조, 「영조대 초반의 탕평책과 탕평파의 활동: 탕평 기반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진단학보』56,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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