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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기구|대표표제=안기역|한글표제=안기역|한자표제=安奇驛|대역어=|상위어=안기도(安奇道)|하위어=|동의어=안기역(安基驛)|관련어=속역(屬驛), 공민왕(恭愍王), 역리(驛吏), 역노(驛奴), 역비(驛婢), 관사(館舍), 보민창(補民倉), 사창(社倉), 소양관(蘇楊舘)|분야=경제/교통/육운|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朝鮮)|왕대=|집필자=조병로|설치시기=14세기말|폐지시기=1896년(건양 1) 1월|소속관서=병조(兵曹)|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2386|실록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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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기구|대표표제=안기역|한글표제=안기역|한자표제=安奇驛|대역어=|상위어=평구도(平丘道)|하위어=|동의어=|관련어=경기강원도정역찰방(京畿江原道程驛察訪), 안수역(安遂驛), 역도(驛道), 역로(驛路), 춘주도(春州道), 포천(抱川)|분야=경제/교통/육운|유형=집단·기구|지역=포천|시대=조선|왕대=|집필자=정요근|설치시기=고려|폐지시기=1896년(고종 33) 1월|소속관서=병조|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6065|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ia_10204011_006 『성종실록』 2년 4월 11일]}}
  
조선시대 경상도의 [[역도(驛道)]] 중 하나인 안기도에 속한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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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기도 포천에 위치했던 역.
  
 
=='''개설'''==
 
=='''개설'''==
  
고려시대에는 성종에서 문종 연간에 역을 매개로 한 교통로인 [[역로(驛路)]]를 22역도-525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하였다. 이때 안기역은 상주도(尙州道)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 당시 이름은 안기역(安基驛)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연간에 안기역(安奇驛)으로 개칭되어 [[안기도(安奇道)]]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건양 1)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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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안기역(安奇驛)은 포천(抱川) 북쪽 4리(약 1.6㎞) 지점에 위치하였다. 안기역은 고려시대 춘주도(春州道)에 편제되었던 안수역(安遂驛)의 후신으로 여겨지며, 조선시대에는 평구도(平丘道) 소속 역()이었다.
  
=='''설립 경위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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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변천'''==
  
안기역은 고려시대에 상주도에 속해 있던 안기역(安基驛)에서 비롯되었다.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안기도역지(安奇道驛誌)』에 따르면, 옛날에는 소양관(蘇楊舘)이라 했는데, 고려후기인 1370년(고려 공민왕 19)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오늘날의 안동시에 해당하는 복주(福州)로 피난을 와서 안기역(安奇驛)이라 개칭했다고 한다. 당시 공민왕이 전자은배(殿字銀盃)와 권향로(圈香爐)를 하사했다고 전한 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 뒤 조선시대에는 1395년(태조 4)에 안동 서쪽 5리 지점으로 이설되었고, 세종 연간에 이르러 안기역(安奇驛)으로 개칭되어 안기도를 구성하는 18개 속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안기역은 안동을 중심으로 의성-의흥-신령 방면, 안동-청송-흥해 방면, 안동-진보-영해 방면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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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역은 고려시대 춘주도에 소속되었던 안수역의 후신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 안수역은 포주(抱州: 현 포천)에 위치하였다. 조선시대 들어서 안기역은 『세종실록』「지리지」에 경기강원도정역찰방(京畿江原道程驛察訪) 소속의 역으로 편성되었다. 하지만 이후 1465년(세조 11)에 경기강원도정역찰방 관할하의 역들 중에 녹양역(綠楊驛)과 안기역, 양문역(梁文驛) 등 경기도에 위치한 3역은 평구도로 이속되었고, 강원도에 위치했던 나머지 역들은 은계도(銀溪道)로 별도 설정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204011_006 『성종실록』 2년 4월 11일]).
  
=='''조직 및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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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안기역은 평구도 소속 역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후기까지도 변화가 없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안기역에는 역마(驛馬) 9마리, 역노(驛奴) 15명, 역비(驛婢) 5명이 배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역은 각 역도의 본역을 제외한 나머지 속역의 구체적인 조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역무를 담당한 [[역리(驛吏)]], 역노비 등을 포함한 역속(驛屬)과 역마의 수는 알려져 있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안기역에는 역리 1,019명, 역노(驛奴) 196명, 역비(驛婢) 111명과 역마 14필이 배속되어 있었다. 한편 『안기도역지』에는 인정(人丁) 1,163명, 역노 32명, 역비 7명, [[일수(日守)]] 7명과 역마 14필이 배정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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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역은 한양에서 강원도 회양과 철령을 거쳐 함경도 방면으로 향하는 간선 교통로상에 위치하였다. 남쪽으로는 양주의 녹양역, 북쪽으로는 영평의 양문역과 연결되었으며, 동남쪽으로는 가평의 연동역(連洞驛)과도 이어졌다.
  
또 『안기도역지』에 따르면, 안기역에는 동헌(東軒) 8칸, 통인방(通引房) 1칸, 낭청방(郎廳房) 2칸, 공수청(公須廳) 3칸, 남행랑(南行廊) 6칸, 마구(馬廐) 3칸, 외삼문(外三門) 3칸과 인리청(人吏廳), 관청고(官廳庫) 등이 건립되어 있었으며, 아사(衙舍)인 소양관(蘇襄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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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전국의 역들이 폐지되면서 안기역도 폐지되었다.
  
안기역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 새겨진 곳으로도 유명하고, 특히 소양관 동남쪽 숲 속에는 ‘은배수(銀盃籔)’라 하여 공민왕이 은잔[銀盃]을 매립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이외에 공민왕의 초상을 봉안하는 전각(殿閣)과 국왕신당(國王神堂), 소백당(小白堂), 조산(造山), 괴목총사(槐木叢祠), 성황당 등의 신당을 설치하여 말의 안녕을 빌었다. 국왕신당은 원래 공민왕의 조상(塑像)을 봉안한 곳이었는데, 속설에 의하면 매년 4월 초파일에는 청룡·백호·주작·현무·중앙의 5토(五土)에 안마제(安馬祭)를 지내는데, 이곳에서는 청룡을 제사 지냈다고 한다. 그밖에 사객을 영송하는 관사(館舍)와 환곡을 관장하는 보민창(補民倉), 사창미(社倉米)를 관장하는 [[사창(社倉)]]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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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역의 위치는 현재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에 해당된다.
 
 
=='''변천'''==
 
 
 
조선시대의 안기역은 고려시대 상주도에 속해 있던 안기역(安基驛)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안기도역지』에 따르면, 1370년에 홍건적의 난을 피해 복주로 피난 온 공민왕이 옛날부터 있었던 소양관을 안기역(安奇驛)로 개칭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1395년에 안동 서쪽 5리 지점으로 이설되었고, 세종 연간에는 안기역(安奇驛)으로 개칭되어 안기도의 속역이 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대전회통(大典會通)』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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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영남읍지(嶺南邑誌)』     
 
*『안기도역지(安奇道驛誌)』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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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5 판



조선시대 경기도 포천에 위치했던 역.

개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안기역(安奇驛)은 포천(抱川) 북쪽 4리(약 1.6㎞) 지점에 위치하였다. 안기역은 고려시대 춘주도(春州道)에 편제되었던 안수역(安遂驛)의 후신으로 여겨지며, 조선시대에는 평구도(平丘道) 소속 역(驛)이었다.

내용 및 변천

안기역은 고려시대 춘주도에 소속되었던 안수역의 후신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 안수역은 포주(抱州: 현 포천)에 위치하였다. 조선시대 들어서 안기역은 『세종실록』「지리지」에 경기강원도정역찰방(京畿江原道程驛察訪) 소속의 역으로 편성되었다. 하지만 이후 1465년(세조 11)에 경기강원도정역찰방 관할하의 역들 중에 녹양역(綠楊驛)과 안기역, 양문역(梁文驛) 등 경기도에 위치한 3역은 평구도로 이속되었고, 강원도에 위치했던 나머지 역들은 은계도(銀溪道)로 별도 설정되었다(『성종실록』 2년 4월 11일).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안기역은 평구도 소속 역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후기까지도 변화가 없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안기역에는 역마(驛馬) 9마리, 역노(驛奴) 15명, 역비(驛婢) 5명이 배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안기역은 한양에서 강원도 회양과 철령을 거쳐 함경도 방면으로 향하는 간선 교통로상에 위치하였다. 남쪽으로는 양주의 녹양역, 북쪽으로는 영평의 양문역과 연결되었으며, 동남쪽으로는 가평의 연동역(連洞驛)과도 이어졌다.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전국의 역들이 폐지되면서 안기역도 폐지되었다.

안기역의 위치는 현재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에 해당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