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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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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장성부 |
한글표제 | 장성부 |
한자표제 | 長城府 |
상위어 | 전라도(全羅道) |
동의어 | 고시이(古尸伊), 갑성(岬城), 오산(鰲山), 이성(伊城) |
관련어 | 입암산성(笠巖山城)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정성일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장성부(長城府)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33년 7월 22일, 『효종실록』 6년 4월 17일, 『세조실록』 1년 9월 11일, 『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숙종실록』 4년 11월 23일, 『영조실록』 36년 10월 27일, 『고종실록』 10년 2월 27일 |
전라남도 장성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940년(고려 태조 23)에 갑성군을 장성군으로 고쳐서 영광군에 소속시켰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삼계현이 영광군에, 진원현이 나주목에 각각 예속되었다. 1172년(고려 명종 2)에 장성군과 진원현에 각각 감무를 두었다. 조선 개창 후인 1409년(태종 9)에 진원현이 관할해 오던 1향을 진원현에 편입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장성과 진원에 각각 현감(縣監)을 파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장성과 진원이 모두 쇠잔해져 1600년(선조 33)에 통합하였다. 1655년(효종 6)에는 장성의 읍격을 높여 도호부사로 하였는데, 이것은 군비 확장에 따른 장성의 입암산성(笠巖山城) 수축 때문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장성부가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940년에 장성군으로 고쳐서 영광군에 소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1018년에 삼계현과 장성군이 영광군에, 진원현이 나주목에 예속되었다. 1172년에 장성군과 진원현에 각각 감무를 두었다. 조선 건국 후에도 이것이 이어졌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 무렵 진원현이 관할해 오던 1향, 즉 마량(馬良)이 폐지되어 진원현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이로써 그곳 주민들이 토호(土豪)나 향리(鄕吏)의 사적 지배에서 벗어나 점차 공민화(公民化)되었다. 1413년에 장성과 진원에 현감이 파견되었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장성현에 종6품 현감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현감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고 그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장성현은 현감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감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증보문헌비고』에는 1655년에 장성현감을 도호부사로 승격시켰다고 되어 있다.
변천
임진왜란 이후 장성과 진원이 모두 쇠잔해져 두 곳을 합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그 시기를 1597년(선조 30)으로 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1600년(선조 33)에 전라감사이홍로(李弘老)가 진원현감한영(韓瀛)의 파직을 요청한 것을 보면(『선조실록』 33년 7월 22일), 장성과 진원의 통폐합은 1600년 이후로 보인다. 1655년에 장성의 읍격을 높여서 도호부사로 하였다(『효종실록』 6년 4월 17일). 이것은 장성에 입암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1455년(세조 1)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인근 고을을 익(翼)에 분속시켰다. 바다와 인접한 곳은 그 전부터 진(鎭)을 설치하고 진장(鎭將)을 두어 방어하였지만, 내륙의 주현(州縣)에는 아직 진이 설치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지에도 거진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좌·우·중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진원현을 비롯하여 담양·창평·화순을 전라도 나주도(羅州道)의 좌익으로 삼았다. 우익은 고창과 장성으로 하였으며, 중익은 나주·광주·남평·능성·영암으로 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세조 3)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행정 구역상의 도(道)와 군사 조직 단위인 도가 혼동을 일으켰는데, 이제는 군사 명칭의 도는 사라지고 진만 사용하게 되었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광주도 그중 하나이다. 전라도의 광주진에는 담양·장성·진원·창평·화순·동복·능성이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진관 체제는 그 뒤로도 조금씩 변화를 거치면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충좌위의 중부(中部)에는 전주진관, 좌부(左部)에는 순천진관, 우부(右部)에는 나주진관, 전부(前部)에는 장흥진관과 제주진관, 후부(後部)에는 남원진관의 군사가 편성되었다. 장성이 속한 광주진은 나주진관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5개 거진을 중심으로 그 아래 여러 진에 편제된 내륙과 연해 지역의 육군과 수군이 전라도의 방위를 맡았다.
1678년(숙종 4)에는 입암산성의 관리를 둘러싸고 장성부와 나주목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장성은 입암성장(立巖城將)이자 영장(營將)을 겸하고 있어서 나주를 호령하려 하였고, 나주는 그 진관인 까닭에 장성의 아래가 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숙종실록』 4년 11월 23일). 1760년(영조 36)에는 강진현에 있던 전라도 병영을 장성부로 옮겨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영조실록』 36년 10월 27일). 1873년(고종 10)에 해안 방어를 강화하면서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별포군(別砲軍) 46명을 추가로 설치하였을 때 장성부에도 50명을 두었다(『고종실록』 10년 2월 27일).
1895년에 8도 체제 폐지와 함께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장성부가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首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장성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장성군마을사(남면편)』, 장성군, 1995.
- 『장성군사』, 장성군, 2001.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