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평역(雄平驛)"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1:5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웅평역 |
한글표제 | 웅평역 |
한자표제 | 雄平驛 |
상위어 | 거산도(居山道) |
동의어 | 웅평참(雄平站) |
관련어 | 길주목(吉州牧), 길성현(吉城縣), 시리도(施利道), 역도(驛道), 역로(驛路) |
분야 | 경제/교통/육운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길주, 길성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정요근 |
폐지 시기 | 1896년(고종 33) 1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웅평역(雄平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
조선시대 함경도 길주에 위치했던 역.
개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웅평역(雄平驛)은 길성현(吉城縣, 길주가 강등되었을 때의 명칭) 남쪽 3리(약 1.2㎞) 지점에 위치하였다. 웅평역은 고려시대에 존재하지 않았고 조선시대에 신설된 역(驛)이었다. 거산도(居山道)의 소속 역으로 편성되었다.
내용 및 변천
웅평역이 위치했던 길주 지역은 천리장성 외부에 있어 고려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던 곳이었으나, 고려말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영토로 정식으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웅평역은 고려시대에는 설치되지 않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웅평역이 1422년(세종 4)에 신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1423년(세종 5)에 신설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함경도 지역의 역들은 남쪽의 안변 지역으로부터 북쪽의 두만강 연안에 이르기까지 해안가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편성된 교통로를 중심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이 역들에 대한 역도(驛道) 편성은 몇 차례의 변동을 거친 후에 고산도(高山道), 거산도(居山道), 수성도(輸城道) 등 3개의 역도로 정비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함경도의 역들이 모두 이 3개의 역도로 편제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웅평역은 시리도(施利道) 소속으로 기록되었지만(『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이후 몇 차례의 역도 개편을 통해 『경국대전』에 웅평역은 거산도 소속의 역으로 기록되었다. 『대전회통』에도 변함없이 웅평역은 거산도에 소속되었다.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긴 했으나 거산도는 대체로 남쪽의 홍원에서 동북쪽으로는 명천, 북쪽으로는 갑산 사이에 위치한 역들로 편성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웅평역에는 상등마(上等馬) 2마리, 중등마(中等馬) 6마리, 하등마(下等馬) 9마리, 역리(驛吏) 169명, 역노(驛奴) 312명, 역비(驛婢) 132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웅평역은 남쪽으로는 단천 방면, 북쪽으로는 명천·경성 방면과 연결되는 한양~경흥간 간선 교통로상에 위치하였다. 웅평역에서는 남쪽으로 길주 임명역(臨溟驛), 북쪽으로 명천 고참역(古站驛) 등과 연결되었다.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전국의 역들이 폐지되면서 웅평역도 폐지되었다.
웅평역의 위치는 현재 북한의 행정 구역으로 함경북도 길주군 쌍룡리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호구총수(戶口總數)』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정요근, 「조선초기 驛路網의 전국적 재편」, 『조선시대사학보』46, 조선시대사학회, 2008.
-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한국평화문제연구소 공편, 『조선향토대백과사전』, 평화문제연구소,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