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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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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점막 |
한글표제 | 점막 |
한자표제 | 店幕 |
상위어 | 장시(場市) |
동의어 | 주막(酒幕) |
관련어 | 원(院), 포자(鋪子) |
분야 | 경제/산업/상업·무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송양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점막(店幕) |
상인과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사설의 숙박 장소.
개설
점막은 상인과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사설 숙소를 가리킨다. 조선전기에는 조정에서 원(院)을 설치하여 숙박을 제공하였으나 조선후기 상업이 점차 발달하면서 상인과 여행자가 증가하자 민간의 사설 숙박 장소인 점막이 증가하게 되었다. 점막은 장시의 발달과 궤를 함께하였으며 주요 교통로를 중심으로 개설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점막은 장시를 중심으로 지방 상업이 발달하면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선전기에는 주로 원이 그 기능을 담당했다. 원은 역(驛), 참(站), 관(館)과 같은 공적인 성격을 띠었지만 한편으로 일반 상인이나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특히 17세기 후반 이래 상공업과 유통경제가 급격하게 발달함에 따라 대개의 원들은 주막이나 점막과 같은 기능이 현저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결국 전문적으로 상인과 여행자의 숙박을 위한 장소로써 점막이 등장하게 되고 이와 더불어 물품의 교역장소로도 기능하여 점막은 상업발달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점막은 18세기 중반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지방의 각종 읍지를 통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大東輿志)』에는 일부 누락된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996개의 원점(院店)이 확인된다. 누락된 수를 감안한다면 전국에 1천여 개가 넘는 점막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변천
장시의 발달과 함께 교통로의 결정점 또는 읍과 읍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이나 요지에 점막의 설립이 증가했다. 점막은 일반적으로 상인이나 여행자에게 숙박과 주식을 판매하는 것을 주된 업으로 삼았으며, 장시의 근방이나 대로 근방 또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노정의 중간지점 등에 설립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읍지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역원에 포자를 설치하고 주점을 두어 물화유통의 장소로 삼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점막이 상업유통의 장소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점막은 암행어사나 위유사 등이 민정을 파악하기 위해 둘러보는 곳이기도 했고, 임금의 전달 사항인 윤음이나 조정의 명령인 정령(政令) 등을 게시하는 홍보의 장이기도 하였다.
점막은 상인이나 여행자에 의해 새롭게 개발되는 도로 등에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상인과 여행자들에게만 의지하는 점막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이 생겨날 정도로 상인들의 지역 간 물화교역도 활발했다. 정조대에 이르면 상인과 여행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샛길의 점막을 이용하면서 역참이 쇠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에 따라 첩로(捷路)에 있는 점막을 모두 철거하고 행인의 왕래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최재경, 「조선시대 「院」에 대하여」, 『영남사학』4,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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