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창(蒜山倉)"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1:5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산산창 |
한글표제 | 산산창 |
한자표제 | 蒜山倉 |
상위어 | 재정(財政) |
관련어 | 명지도(鳴旨島), 공염제(公鹽制), 포항창(浦項倉) |
분야 | 경제/재정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욱 |
폐지 시기 | 1819년(순조 19)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산산창(蒜山倉) |
1745년(영조 21) 경상도 김해명지도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국가 재정에 활용하기 위하여 세운 관창.
개설
조선 정부는 1731년 경상도 김해명지도의 소금 생산과 판매를 주관하여 많은 재정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그 운영 과정에서 많은 비판과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고, 정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 산산창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극심한 흉년으로 국가의 재정이 부족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731년(영조 7) 12월 명지도에 공염제가 시행되었다. 정부는 소금 생산자에게 땔감과 식량 일부를 지급하고, 소금 생산 기간 동안 잡역을 면제해 주었다. 대신 생산된 소금의 절반을 수취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공염제의 운영으로 상당한 재정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염제는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국가에서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주관하는 것은 ‘국가가 상인과 이익을 다투는 행위’라는 비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금 생산을 관리하는 일 자체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지도의 소금 생산을 국가 재정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모색되었고, 그 결과가 1745년 산산창의 설치였다.
조선 정부는 산산창을 설치하면서 두 가지 명분을 내세웠다. 하나는 함경도 지역에 곡물을 공급하는 포항창의 곡식을 보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호서와 호남 지방의 흉년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각종 권력 기간의 침탈에 노출된 소금 생산자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조직 및 역할
1745년 설치된 산산창은 비변사에서 관리하고, 실질적인 운영은 비변사에서 파견한 별장이 담당하였다. 경상감사는 소금을 유통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정행위를 단속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산산창에서 쌀을 대여해 주고 소금을 거둘 때 부정을 막기 위하여 명지도와 녹도 거주민 2명을 양도도호수(兩島都戶首)로 삼아 관리하게 하였다.
산산창 설치 이후 명지도에서 소금을 확보하는 방식은 이전과 크게 바뀌었다. 이전에는 정부에서 명지도의 소금 생산과 판매를 모두 주관하였다. 그러나 산산창을 설치한 이후 정부는 명지도의 소금 생산에 관여하지 않았다. 정부는 환곡을 운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금 생산자에게 쌀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소금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소금을 낙동강 상류 지역에 판매하여 거기서 얻은 수익을 재정에 활용하였다. 즉, 정부에서는 매년 11월 산산창의 쌀 1,500석을 명지도의 소금 생산자에게 대여해 주어 소금을 생산하는 자금으로 사용하게 한 다음, 이듬해 2월에 쌀 1석당 소금 2석으로 계산하여 소금 3,000석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해 안에 소금 3,000석을 판매하여 쌀 3,000석을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변천
산산창이 설치된 지 15년 후인 1760년(영조 36)에 정부는 산산창을 운영하는 방법을 개정하였다. 그 내용은 별장 및 감영에서 파견하는 색고(色庫)를 혁파하고 산산창 운영을 김해부에 일임하는 것이었다. 이때까지도 최종 관리는 비변사에서 담당하였다. 그러나 1763년에는 그 관리마저 경상감영으로 이관하였다. 이후 산산창 운영에서 얻는 이윤은 감영의 재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산산창에서 거둬들인 소금[公鹽]이 경상도 내륙지방에서 모두 판매될 때까지는 다른 상인이나 소금 생산자들의 소금[私鹽] 판매를 금지하였다. 이 때문에 경상도 내륙지방의 소금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리들이 소금 구매자들에게 비싼 값에 억지로 판매하는 폐단이 발생하였다. 그 때문에 대다수 관료들은 산산창 운영이 정부가 상인들과 이익을 다투는 행위라고 비판하고, 그 폐지를 주장하였다. 결국 산산창 운영을 통해 얻었던 재원을 보충할 다른 방법이 생기자, 1819년(순조 19) 산산창은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강만길, 「조선시대 공염제도고-명지도 염장을 중심으로」, 『사학지』 4 , 단국대학교사학회, 1970.
- 이욱, 「18세기 명지도 공염제 운영의 변화와 그 성격」, 『한국사연구』 120, 한국사연구회, 200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