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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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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궁내부 |
한글표제 | 궁내부 |
한자표제 | 宮內府 |
하위어 | 시종원(侍從院), 비서원(秘書院), 규장원(奎章院), 경연원(經筵院), 장예원(掌禮院), 종정원(宗正院), 귀족원(貴族院), 회계원(會計院), 전의사(典醫司), 봉상사(奉常司), 전선사(典選司), 상의사(常衣司), 주전사(主殿司), 영선사(營繕司), 태복사(太僕司), 내장사(內藏司), 물품사(物品司), 통신사(通信司), 철도원(鐵道院), 서북철도국(西北鐵道局), 예식원(禮式院), 경위원(警衛院), 광학국(礦學局), 수륜원(水輪院), 관리서(管理署), 평식원(平式院), 박문원(博文院), 수민원(綬民院), 내장원(內藏院) |
관련어 | 의정부(議政府)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대한제국기 |
왕대 | 고종 |
집필자 | 김영수 |
폐지 시기 | 1910년(순종 4)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궁내부(宮內府) |
고종 때 왕실에 관한 여러 업무를 총괄하던 관청.
개설
궁내부는 1894년 6월 설치되고 1895년 11월 16개의 부서로 개편되었다. 1903년 11월에는 전체 28개 부서로 확대되었다. 제실 제도 정리국의 활동을 바탕으로 1905년 3월 궁내부 관제가 전면적으로 개정되어 궁내부는 그 역할이 축소되었고 1910년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대한제국기 고종은 군주 중심의 ‘전제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궁내부에 자신의 정치 세력을 결집시켰다. 궁내부를 중심으로 정치 세력을 형성한 이범진, 이재순, 이용익 계열은 군주권의 강화를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일본의 위협에 대응하여 러시아, 프랑스와의 협력 방안을 추진하였다. 고종은 이들을 단일한 세력으로 통합시키지 않으면서 상호 간 경쟁을 유발하여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자극했다. 궁내부에 기반을 두고 이들은 각자의 영역을 담당하였는데 정치는 이재순이, 재정은 이용익이, 외교는 이범진이 각 분야에서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은 각자의 주요한 영역이 달랐기 때문에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 중요한 정치적 사건에서는 상호 연대할 수 있었다.
조직 및 역할
1895년 11월 10일 설치된 궁내부는 16개의 원(院)과 사(司)로 구성되었다. 이때의 원과 사는 시종원, 비서원, 규장원, 경연원, 장예원, 종정원, 귀족원, 회계원, 전의사, 봉상사, 전선사, 상의사, 주전사, 영선사, 태복사, 내장사였다. 전체 정원은 163명이었다.
궁내부는 고종이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설치했고, 자신의 측근 인물을 주요 보직에 임명했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궁내부에 기반한 이재순, 이범진, 이용익 계열을 적극 후원하였다. 이범진은 궁내부 대신사무대리, 내장원 경을 역임했다. 아관파천 이후 법부 대신에 임명된 이범진은 을미사변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정국을 주도했다. 하지만 독립협회에 기반한 정치 세력은 이범진의 지나친 권력 집중을 우려하여 그를 강력하게 견제했다. 그러나 견제에도 불구하고 이범진은 1896년 6월 주미 공사, 1899년 3월 주러 공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1900년까지 도쿄, 워싱턴에만 자국 공사를 주재시켰다. 의화단 사건 이후 대한제국·만주를 둘러싸고 러시아·일본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고종은 주미 공사를 역임한 이범진을 주러 공사에 임명하였다. 이는 이범진이 고종의 신임 아래 대한제국 외교 분야 업무를 수행하는 핵심 인물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범진의 주미 공사 임명으로 함경도 출신이자 러시아 연대를 주장하는 궁내부 세력의 결속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은 이범진의 정치적 공백을 메우며 자신의 의사를 충실히 실행할 인물로 함경북도 명천(明川) 태생인 이용익을 지목했다. 광산 경영에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던 이용익은 1897년 11월 탁지부(度支部) 전환국장(典園局長)에 임명되었고, 12월 각 도·군(道郡)의 금(金)·은(銀)·동(銅)·철(鐵)·석탄과 관련한 광산의 사무를 감독했다. 오랫동안 내장원 경을 역임한 이용익은 고종의 강력한 후원 아래 탁지부의 화폐 업무와 전국 광산 업무를 총괄하면서 대한제국 재정 분야의 업무를 수행하는 핵심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종친정시문과(宗親庭試文科)에 합격한 청안군(淸安君)이재순은 종친 내부에 폭넓은 지지 기반을 갖고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친일 세력에 의해 궁궐에 감금되자 대궐 공격을 시도한 춘생문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때 시위대 장교와 병사를 결집하여 대궐 공격을 주도한 사람이 시종원 경이재순이었다. 대한제국기 궁내부 대신을 여러 차례 역임한 이재순은 고종의 군주권 강화를 위해서 각종 정치적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대한제국 정치 분야의 업무를 수행한 핵심 인물이었다.
변천
1896년 기존의 원과 사에 47명이 증원되었고, 12개의 기구가 신설되었다. 이때 신설된 기구는 물품사, 통신사, 철도원, 서북철도국, 예식원, 경위원, 광학국, 수륜원, 관리서, 평식원, 박문원, 수민원이었다. 신설된 기구에 소속된 궁내관과 광무 연간에 급격히 확대된 내장원에 증설된 관원을 합치면 259명으로, 1903년 말 궁내부의 정원은 469명이었다.
참고문헌
- 서영희, 『대한제국 정치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김영수, 「대한제국 초기 고종의 정국구상과 궁내부의 세력변동」, 『사림』3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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