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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황해도의 도로망인 금교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황해북도 봉산군에 위치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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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의 도로망인 대동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개설'''==
  
소곶역(所串驛)은 조선전기 세종대에는 [[기린도(麒麟道)]]에 속한 역이었다가, 그 뒤 세조 연간에 전국의 역제(驛制)를 41[[역도(驛道)]]-543속역(屬驛) 체제로 개편할 때 금교도(金郊道)를 구성하는 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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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곶역(所串驛)은 조선전기 세종대에는 평안도관로찰방(平安道館路察訪)에 속한 역이었다. 그 뒤 세조대의 역제 개편을 거쳐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제정 및 편찬하는 과정에서 [[대동도(大同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로 확립되어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실록』「지리지」황해도 황주목 봉산군 편에 따르면, 소곶역은 도공역(陶工驛)과 함께 봉산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다. 세종대에 전국적인 역도-역로 조직을 갖추는 과정에서 기린역(麒麟驛)·달만역(達滿驛)·삼지역(三支驛) 등과 함께 기린도 [[역승(驛丞)]] 관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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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 평안도 의주목 정녕현 편에 따르면, 소곶역은 정녕현에 설치된 유일한 역관(驛館)이었다. 세종대에 전국적으로 역도-역로 조직을 갖춤에 따라 [[생양역(生陽驛)]]·[[대동역(大同驛)]]·[[안정역(安定驛)]] 등과 함께 평안도 관로찰방 소속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는 봉산 소곶역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고, 그 외에도 관련 기록이 없어, 역마나 역민 등의 배속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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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평안도 의주 편에 따르면, 소곶역에는 역마 4필과 역노(驛奴) 90명, 역비(驛婢) 80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변천'''==
  
조선시대의 역제는 세종대의 개편을 거쳐 세조대에 41역도-543속역 체제로 재편되었다.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체제가 수록됨으로써 확립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소곶역은 기린도에서 금교도 소속으로 바뀌었다. 그밖에는 소곶역의 변천 사항에 대해 자세히 알려져 있는 것이 없다. 『여지도서』에는 관련 기록이 없고,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봉산 지역의 역으로 [[검수역(劒水驛)]]과 [[동선역(洞仙驛)]]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소곶역은 19세기 이전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는 모두 봉산군 동쪽 5리 지점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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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곶역은 세조대의 역제 개편을 거쳐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제정 및 편찬하는 과정에서 대동도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대동도에 속한 역으로 존속하였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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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소곶역은 조선전기에는 소곶관(所串館)으로, 조선후기에는 소관참(所串站)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1424년(세종 6)에는 소곶관·운흥관(雲興館)·거연관(車輦館) 등의 관(館)이 신안참(新安站)·임반참(林畔站)·양책참(良策站)·의순참(義順站) 등 각 참(站)의 중앙 요지에 해당하므로, 지방 관아의 경비 조달을 위한 토지인 늠전(廩田)을 더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 역에서 역마를 길러 공용으로 바치는 입마(立馬)가 제대로 시행되도록 하기 위해, 각 관에 있는 보충군(補充軍)과 혁파한 절의 사내종 가운데에서 지원자를 받아 참(站)마다 10호씩 더 정착해 살도록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3023_002 『세종실록』 6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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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신안관에서 임반관, 임반관에서 양책관, 양책관에서 의주까지의 역 간 거리가 멀어 역마가 견디지 못하고 죽는 등의 폐단이 나타나자, 1434년(세종 16)에는 규모가 작은 소관(小館)인 소곶관·운흥관·거연관 등 세 관을 대관(大館)의 격에 따라 처우하여 역민(驛民)과 역마를 더 두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7025_004 『세종실록』 16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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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년(성종 8)에는 소곶관에 설치한 목책이 견고하지 못하므로, 근처에 있는 옛 성터를 수축하여 병사를 주둔시키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806017_004 『성종실록』 8년 6월 17일]). 이를 통해 소곶관을 비롯한 평안도의 각 관은 중국 사신이 머무르는 역관이자 외적을 막아 내기 위한 주요 방어 진지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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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곶역은 원래 의주목 정녕현에 있었는데, 1444년(세종 26)에 방산현(方山縣)으로 옮겨졌다. 『여지도서』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의주목 관아 남쪽 33리,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관아 남쪽 35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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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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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1 판



조선시대 평안도의 도로망인 대동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소곶역(所串驛)은 조선전기 세종대에는 평안도관로찰방(平安道館路察訪)에 속한 역이었다. 그 뒤 세조대의 역제 개편을 거쳐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제정 및 편찬하는 과정에서 대동도(大同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로 확립되어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실록』「지리지」 평안도 의주목 정녕현 편에 따르면, 소곶역은 정녕현에 설치된 유일한 역관(驛館)이었다. 세종대에 전국적으로 역도-역로 조직을 갖춤에 따라 생양역(生陽驛)·대동역(大同驛)·안정역(安定驛) 등과 함께 평안도 관로찰방 소속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평안도 의주 편에 따르면, 소곶역에는 역마 4필과 역노(驛奴) 90명, 역비(驛婢) 80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소곶역은 세조대의 역제 개편을 거쳐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제정 및 편찬하는 과정에서 대동도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대동도에 속한 역으로 존속하였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소곶역은 조선전기에는 소곶관(所串館)으로, 조선후기에는 소관참(所串站)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1424년(세종 6)에는 소곶관·운흥관(雲興館)·거연관(車輦館) 등의 관(館)이 신안참(新安站)·임반참(林畔站)·양책참(良策站)·의순참(義順站) 등 각 참(站)의 중앙 요지에 해당하므로, 지방 관아의 경비 조달을 위한 토지인 늠전(廩田)을 더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 역에서 역마를 길러 공용으로 바치는 입마(立馬)가 제대로 시행되도록 하기 위해, 각 관에 있는 보충군(補充軍)과 혁파한 절의 사내종 가운데에서 지원자를 받아 참(站)마다 10호씩 더 정착해 살도록 하였다(『세종실록』 6년 3월 23일).

한편, 신안관에서 임반관, 임반관에서 양책관, 양책관에서 의주까지의 역 간 거리가 멀어 역마가 견디지 못하고 죽는 등의 폐단이 나타나자, 1434년(세종 16)에는 규모가 작은 소관(小館)인 소곶관·운흥관·거연관 등 세 관을 대관(大館)의 격에 따라 처우하여 역민(驛民)과 역마를 더 두게 하였다(『세종실록』 16년 7월 25일).

1477년(성종 8)에는 소곶관에 설치한 목책이 견고하지 못하므로, 근처에 있는 옛 성터를 수축하여 병사를 주둔시키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8년 6월 17일). 이를 통해 소곶관을 비롯한 평안도의 각 관은 중국 사신이 머무르는 역관이자 외적을 막아 내기 위한 주요 방어 진지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소곶역은 원래 의주목 정녕현에 있었는데, 1444년(세종 26)에 방산현(方山縣)으로 옮겨졌다. 『여지도서』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의주목 관아 남쪽 33리,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관아 남쪽 35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