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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남부에 있으며 동쪽으로 배천[白川], 북쪽과 서쪽으로 평산(平山), 남쪽으로 황해 바다에 접한 곳에 설치되어 주민들을 관할하였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연안부(延安府)는 황해도 남부 해안 지역에 설치된 읍으로 1413년(태종 13)부터 도호부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연안군이 되었고, 1914년에 인근의 배천군[白川郡]과 합하여 연백군(延白郡)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동삼홀(冬三忽)이었으며, 시염성(豉鹽城)이 있었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해고군(海皐郡)이 세워졌다. 고려초에 염주(鹽州)라 하였고, 995년(고려 성종 14)에 방어사가 설치되었으나 현종 초에 방어사를 폐지하면서 해주의 속읍이 되었다. 1217년(고려 고종 4)에 거란군의 침공을 막아 낸 공으로 영응현(永膺縣)으로 승격되었으며, 1269년(고려 원종 10)에 석주(碩州)로 이름이 바뀌었다.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온주목(溫州牧)으로 승격되었으나,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목(牧)에서 군(郡)으로 강등되었고 명칭도 연안(延安)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는 1393년(태조 2)에 부평(富平)과 함께 경기우도의 계수관(界首官)이 되었다(『태조실록』 2년 11월 12일). 1413년에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우도에서 황해도(풍해도)로 이속되었다(『태종실록』 13년 8월 1일).

조직 및 역할

부사는 음관 3품관이 보임되었다. 좌수 1명, 별감 3명, 상정도감 1명, 연분도감 1명, 군관 55명, 아전 50명, 지인 18명, 사령 40명, 관노 37명, 관비 21명이 있었다. 소속 군병으로 시위군 65명, 영진군 131명, 선군 242명이 있었다.

변천

1895년에 23부제 시행으로 해주부 연안군이 되었고, 이듬해에 다시 황해도 연안군이 되었으나, 1914년에 인접한 배천군과 통합하여 연백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황해도(黃海道)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黃海道) 연안(延安)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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