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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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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봉산군 |
한글표제 | 봉산군 |
한자표제 | 鳳山郡 |
상위어 | 황해도(黃海道) |
동의어 | 휴류(鵂鶹), 봉주(鳳州) |
관련어 | 휴류성(鵂鶹城)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강석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봉산군(鳳山郡)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
황해도 중앙에 있으며 동쪽으로 서흥, 남동쪽으로 평산, 남서쪽으로 재령, 북서쪽으로 안악, 북쪽으로 황주와 접하는 지역에 설치되어 주민들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봉산군(鳳山郡)은 1413년(태종 13)에 설치되어 조선말기까지 읍격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한양에서 의주까지 이어지는 직로에 있는 황해도 방위의 요충지였으므로 조선후기에는 황해도 전영(前營)이 되었고 군수가 영장(營將)을 겸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땅이었으며 휴류성(鵂鶹城)이 설치되었다. 통일신라시대 748년(신라 경덕왕 7)에 서암군(棲嵒郡)이 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태봉의 판도였으며 고려시대인 940년(고려 태조 23)에 봉주(鳳州)가 되었고, 995년(고려 성종 14)에 방어사가 설치되었다. 1012년(고려 현종 3)에 방어사를 폐지하고 황주의 속군이 되었다. 1285년(고려 충렬왕 11)에 봉양군(鳳陽郡)이 되었고 방어사를 두었으나 곧 봉주로 환원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에 봉산군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군수는 전영장(前營將)을 겸하였으며 문무 3품 이상 당상관이 보임되었다. 좌수 1명, 별감 2명, 상정도감(詳定都監) 2명, 보민도감(補民都監) 2명, 소폐도감(蘇弊都監) 1명, 전적도감(田籍都監) 1명, 관청도감(官廳都監) 2명, 사창감관(司倉監官) 2명, 군무별장(軍務別將) 1명, 천총 1명, 파총 5명, 초관 9명, 집사 2명, 기고관 28명, 교사 9명, 군기감관(軍器監官) 2명, 방영군관 50명, 지포군관 17명, 아전 46명, 지인 4명, 공생(貢生) 16명, 나장 24명, 군뢰 31명, 관노 20명, 관비 27명이 있었다. 읍치 동쪽 15리에 있는 상산진(商山鎭)에는 병마첨사가 배치되었다.
변천
1436년(세종 18)에 전염병이 심하여 읍치를 남쪽 14리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서흥, 평산을 거쳐 개성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황해도 방위의 요충이었다. 따라서 조선후기에 영장제가 실시되었을 때 황해도의 전영이 되었고 군수가 영장(營將)을 겸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재편하면서 해주부 봉산군이 되었고(『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에 13도제 시행으로 황해도 봉산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黃海道) 봉산(鳳山)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고승희, 「조선후기 함경도 內地 방어체계」, 『한국문화』3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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