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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7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에 경기도의 교하군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교하군(交河郡)은 조선이 건국한 후 1394년(태조 3)에 감무(監務)가 설치되고, 경기도가 좌·우도로 나뉠 때 좌도에 소속되었다. 1414년(태종 14)에 원평부(原平府)에 소속시켰다가 1418년(태종 18)에 다시 복구시켜 현감으로 고쳤다. 1731년(영조 7)에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파주군(坡州郡)에 편입되었다가 한성부 교하군이 되었다.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교하군은 1394년(태조 3)에 감무를 설치하고, 1418년(태종 18)에 현감을 설치하였다. 1731년(영조 7)에 인조와 인렬왕후의 능인 장릉(長陵)을 교하(交河)에 정함으로써 군으로 승격되었다(『영조실록』 7년 8월 4일). 1895년(고종 32) 파주군에 잠시 편입시킬 것이 윤허된 적도 있지만(『고종실록』 32년 1월 14일) 약 넉 달 후에 23부제가 시행될 때 파주군과 함께 한성부에 교하군이 소속된 것으로 보아 앞서 파주군에 편입시키는 일은 시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교하의 행정단위가 현(縣)이었을 때에는 종6품의 현감 1명과 향교의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종9품의 훈도 1명이 소속되었다. 교하가 군으로 승격된 후에는 정4품의 군수 아래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10명, 아전 20명을 두었으며, 훈도는 폐지되었다. 좌수와 별감은 그 운영의 실제에 있어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개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고,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의 6방 업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1394년(태조 3)에 한양의 속현이었던 심악(深岳), 부평의 속향(屬鄕)이었던 석천(石淺), 그리고 교하 세 고을을 합하여 교하감무(交河監務)를 설치하였다(『태조실록』 3년 9월 28일). 1414년(태종 14)에 석천은 원평부(原平府)에 소속시키고, 심악은 고양현에 소속시켰는데, 1418년(세종 즉위)에 다시 복구시켜서 전례에 따라 현감으로 고쳤다. 1435년(세종 17)에는 교하를 원평부에 소속시켰다. 1687년(숙종 13)에 죄인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고을을 폐지하고 파주에 소속시켰다가 4년 뒤인 1690년(숙종 16)에 다시 현으로 복구하였다. 1731년(영조 7)에 인조와 인렬왕후의 능인 장릉을 고을의 옛 관아 터인 검단산(儉丹山) 동쪽 기슭으로 옮기면서 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한성부 교하군이 되었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파주군에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교하현(京畿)
  •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교하(京畿道交河)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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