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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기구|대표표제=공작국|한글표제=공작국|한자표제=工作局|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종묘(宗廟) 사직(社稷)|분야=정치/행정/관청|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초기|왕대=조선초기|집필자=이석규|설치시기=1394년(태조 3) 11월|폐지시기=1395년(태조 4)|소속관서=|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0656|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aa_10202010_001 『태조실록』 2년 2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11003_001 『태조실록』 3년 11월 3일]}}
  
조선초기 함길도 경원도호부에 설치한 토관의 동반 종7품 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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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후 한양에 종묘와 사직을 건축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서.
  
 
=='''개설'''==
 
=='''개설'''==
  
공작국은 1434년(세종 16) 함길도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에 [[토관(土官)]][[동반(東班)]]의 종7품 속사로 처음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이후 『경국대전』 토관직의 아문과 같이 명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폐지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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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국은 1394년(태조 3) 서울을 한양으로 옮긴 직후 설치되어 종묘와 사직을 건축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은 본격적으로 동·서북면 지역을 개척하고 개척지를 방어함과 동시에 북도민을 위무하기 위해 고려말 이래의 토관제를 계승하여 평안도와 함경도의 감영과 요충지인 10여 대도호부, , 도호부에 도무사(都務司) 이하 동반속사와 [[진북위(鎭北衛)]] 등 서반 속위를 설치하고 그 각각에 정5품 이하 수십의 문무 토관직을 두어 운영하였다. 이 중 공작국은 경원도호부에 설치된 동반의 종7품 속사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1015_006 『세종실록』 16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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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 초에 공조(工曹) 전서(典書)이민도(李敏道)가 종묘 세우기를 청하고, 이어 1393년(태조 2)에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권중화(權仲和)가 종묘의 구상도(構想圖)를 그려 올렸다. 이에 태조가 서운관의 풍수학인(風水學人) 이양달(李陽達)과 배상충(裵尙忠)에게 지형을 살펴보도록 하고,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김사행(金師幸)으로 하여금 땅을 측량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aa_10202010_001 『태조실록』 2년 2월 10일]). 이듬해 공작국을 설치하여 종묘와 사직 건축을 관장하게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11003_001 『태조실록』 3년 11월 3일]).
  
 
=='''조직 및 역할'''==
 
=='''조직 및 역할'''==
  
공작국은 종7품의 주부(注簿) 1명, 종9품의 [[녹사(錄事)]] 1명이 있어 역군을 지휘하여 부내의 각종 공역사를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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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국의 조직은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종묘와 사직은 국가의 토대가 되는 상징이고, 각종 공역을 담당한 도감, 색 등이 당상-낭청으로 구성되었음을 미루어 공역을 총관한 당상과 실무를 지휘한 낭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새로 천도한 한양에 왕조의 토대가 된 종묘와 사직을 건축하였다.
  
 
=='''변천'''==
 
=='''변천'''==
  
함길도와 평안도에 처음 토관이 설치될 때에는 각 변진마다 토관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속사의 명칭을 달리하였다. 그러나 1485년(성종 16)에 반포된 『경국대전』에는 의주목과 회령·경원·종성·온성·부령·경흥·강계도호부의 동반 토관속사는 도할서(都轄署)·전례서(典禮署)·융기서(戎器署)·[[사창서(司倉署)]]·전주국(典酒局)·사옥국(司獄局)으로 그 명칭이 통일되어 있고, 공작국은 명칭은 물론 그 기능과 관련된 속사가 없다. 이 점에서 공작국은 1485년 이전에 잡다한 속사의 명칭이 통일될 때 그 기능이 이 중의 한 속사에 이관되면서 폐지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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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년에 설치된 공작국의 변천이 어떠하였는가는 불명하다. 그런데 한양의 종묘와 사직 건축공사가 1394년에 완료되었고, 국은 여타의 도감, 소, 색 등이 특별한 일이나 공사를 수행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가 일이 완료되면 혁파되는 임시기구였다. 이 점에서 공작국은 1394년 종묘와 사직의 준공과 함께 혁거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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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분류:정치]][[분류:행정]][[분류:관청]][[분류:집단·기구]][[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초기]][[분류:조선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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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6 판



조선 건국 후 한양에 종묘와 사직을 건축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서.

개설

공작국은 1394년(태조 3) 서울을 한양으로 옮긴 직후 설치되어 종묘와 사직을 건축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개국 초에 공조(工曹) 전서(典書)이민도(李敏道)가 종묘 세우기를 청하고, 이어 1393년(태조 2)에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권중화(權仲和)가 종묘의 구상도(構想圖)를 그려 올렸다. 이에 태조가 서운관의 풍수학인(風水學人) 이양달(李陽達)과 배상충(裵尙忠)에게 지형을 살펴보도록 하고,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김사행(金師幸)으로 하여금 땅을 측량하게 하였다(『태조실록』 2년 2월 10일). 이듬해 공작국을 설치하여 종묘와 사직 건축을 관장하게 했다(『태조실록』 3년 11월 3일).

조직 및 역할

공작국의 조직은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종묘와 사직은 국가의 토대가 되는 상징이고, 각종 공역을 담당한 도감, 색 등이 당상-낭청으로 구성되었음을 미루어 공역을 총관한 당상과 실무를 지휘한 낭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새로 천도한 한양에 왕조의 토대가 된 종묘와 사직을 건축하였다.

변천

1393년에 설치된 공작국의 변천이 어떠하였는가는 불명하다. 그런데 한양의 종묘와 사직 건축공사가 1394년에 완료되었고, 국은 여타의 도감, 소, 색 등이 특별한 일이나 공사를 수행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가 그 일이 완료되면 혁파되는 임시기구였다. 이 점에서 공작국은 1394년 종묘와 사직의 준공과 함께 혁거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