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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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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문천군 |
한글표제 | 문천군 |
한자표제 | 文川郡 |
동의어 | 문주(文州) |
관련어 | 안변진관(安邊鎭管)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현대 |
집필자 | 김우철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문천군(文川郡)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3년 10월 15일, 『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고종실록』 33년 8월 4일 |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함경도 문천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문천군(文川郡)은 1413년(태종 13) 설치되어 1991년 문천시(文川市)로 승격할 때까지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강점기를 거쳐 북한 치하에서도 동일 지명, 동일 직급의 행정구역으로 기능하였다. 진관(鎭管) 체제 아래에서는 안변진관(安邊鎭管)에 소속되어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의 영토로 당시에는 매구루(買溝婁) 혹은 미구루(味仇婁)라고 하였다.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당(唐)나라와 발해의 영역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매성(妹城)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고구려 때의 지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 들어와 989년(고려 성종 8)에 옥녀봉(玉女峯) 아래에 성(城)을 쌓아 문주(文州)라 하고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뒤에 의주(宜州)에 합쳤다. 1345년(고려 충목왕 1)에 다시 나누어 주(州)로 만들었다.
조선이 건국한 뒤 1413년(태종 13) 10월 15일, 전국의 군현 가운데 ‘주(州)’ 자를 가진 고을을 모두 ‘산(山)’이나 ‘천(川)’ 자로 바꾸었다. 이때 문주도 지금의 이름인 문천(文川)으로 바꾸어 군(郡)으로 만들었다(『태종실록』 13년 10월 15일).
조직 및 역할
군수(郡守)는 문관(文官) 종4품으로, 임기는 30개월이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군수에 직속된 이속(吏屬)으로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관군관(官軍官) 300명, 아전(衙前) 31명, 지인(知印) 17명, 관사령(官使令) 7명, 관노비(官奴婢) 56명, 군뢰(軍牢) 8명, 보민가솔(補民假率) 130명, 병영가솔(兵營假率) 50명, 군기가솔(軍器假率) 100명, 친기위(親騎衛) 20명, 봉무사(烽武士) 100명, 향교노비(鄕校奴婢) 6명, 완호(完戶) 17명, 서원노비(書院奴婢) 5명이 있었다. 안변진관 소속으로 군수가 병마동첨절제사를 겸하였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문천의 관할 행정구역으로는 관아가 소재한 군내사(郡內社)를 위시하여 초한사(草閑社), 명효사(明孝社), 구산사(龜山社), 도지랑사(都之郞社), 운림사(雲林社)의 6사(社)가 있었다.
변천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가 대구역주의인 8도제에서 소구역주의인 23부제로 바뀌면서 함흥부(咸興府) 소속의 문천군이 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이듬해 다시 전국을 13도 8부 1목 331군으로 개편할 때 문천군은 다시 함경남도에 소속되었다(『고종실록』 33년 8월 4일). 해방 이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산시(元山市), 안변군(安邊郡)과 함께 함경남도 관할에서 강원도 관할로 바뀌었다. 1991년에는 시(市)로 승격되어 문천시가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손정목,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1992.
- 통일부, 『2004 북한개요』, 통일부,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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