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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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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문연각 |
한글표제 | 문연각 |
한자표제 | 文淵閣 |
상위어 | 장서각(藏書閣) |
관련어 |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백과전서(百科全書), 문소각(文溯閣), 문원각(文源閣), 문진각(文津閣), 『사고전서(四庫全書)』 |
분야 | 교육·출판/출판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중국 |
시대 | 청, 조선 |
집필자 | 허인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문연각(文淵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22년 8월 23일, 『정조실록』 9년 4월 19일 |
『사고전서』를 수장하기 위하여 청대에 건립한 황실 도서관의 하나로, 중국 북경의 자금성에 있는 누각.
개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칙명으로 1774년(청 건륭 39) 착공하여 1776년 완공되었다. 절강성의 천일각(天一閣)을 모방하여 장중하고 화려한 궁정식 각루로 자금성 안에 건조하였다. 『사고전서(四庫全書)』와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의 두 대백과전서가 수장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대만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원래의 문연각은 명나라 황실도서관으로 설치되었다. 1368년 명나라가 건립된 후 원나라 궁궐에 있는 서적들을 모두 수도인 남경(南京)으로 옮기고, 흩어진 서적들을 모아 보관하였다. 영락제(永樂帝)가 즉위한 이후에는 문연각의 장서들을 활용하여 『영락대전(永樂大典)』을 편찬하고 보관하였다. 1421년(명 영락 19)에 도읍을 옮긴 뒤에는 북경으로 옮겨졌다. 문연각은 청나라 군대가 북경에 입성하는 과정에서 불에 타 버렸다(『인조실록』 22년 8월 23일).
청대에 가서 건륭제가 『사고전서』를 수장하기 위하여 칙명으로 다시 건립했다. 그 위치는 태화문(太和門)의 오른쪽, 문화전(文華殿)의 뒤편이다. 1774년에 착공하여 1776년에 완공하였다. 청나라는 북경과 심양 그리고 열하 세 지역에 네 군데의 황가(皇家) 장서각을 건설하였는데, 북경 원명원(圓明園)의 문원각(文源閣), 열하 피서산장(避暑山莊)의 문진각(文津閣), 심양 고궁의 문소각(文溯閣), 그리고 자금성의 문연각이 바로 그것이다.
문연각을 개수할 때, 건물의 분포와 구도는 절강성의 천일각을 모방하여 장중하고 화려한 궁정식 각루로 건조하였다. 각 앞에 정방형의 늪이 있고 그 위에 다리를 3개 가설하였다. 외관은 2층이나 내부구조는 3층으로 되어 있다. 정면 폭은 5칸에 길이 34.7m, 안 길이는 3칸에 17.4m이다. 위층 마루판 아래의 공간을 이용하여 복도가 중간층이 되도록 함으로써 장서 면적을 확대하였다. 각 앞에는 정방형의 연못을 두고 3개의 다리를 가설하였다.
음양오행설에 의해 자금성의 대부분이 황색 기와에 붉은 담으로 이루어져 불을 상징하는 반면, 문연각의 기와는 검은색이고 벽과 기둥은 청색으로 되어 있다. 이는 북쪽의 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물이 불을 누르듯이 서적이 화재를 당하지 않도록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칸수는 6칸으로, 『역경』의 하늘은 하나로서 물을 낳고, 땅은 여섯으로서 물을 이룬다는 뜻을 따른 것이다.
변천
『사고전서』의 초본과 또 다른 대백과전서인 『고금도서집성』이 수장되어 있었다. 조선은 『사고전서』의 완성과 보관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듣고 있었다. 1784년 겨울에 『사고전서』 4부를 베끼는 일이 끝나 문연각·문원각·문진각·문소각 등의 전각에 갈라서 보관하였으며, 『사고전서』는 매 부마다 모두 36,000권이나 된다는 것이었다(『정조실록』 9년 4월 19일). 『사고전서』의 초본과 또 다른 대백과전서인 『고금도서집성』이 수장되어 있었으나, 1948년 중국 국민당이 본토를 상실하고 대만으로 옮겨갈 때 함께 가지고 가서 현재는 대만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 위안싱페이 저, 장연·김호림 옮김, 『중국문명대시야』, 김영사, 2007.
- 鄭志海·屈志靜, 『북경자금성』, 今日中國出版社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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