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철도합자회사(京仁鐵道合資會社)"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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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5 기준 최신판



1899년(광무 3) 경인철도인수조합이 중심이 되어 미국인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매득하면서 설립한 철도 회사.

개설

경인철도합자회사(京仁鐵道合資會社)는 일본인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 남작이 1899년 사장으로 부임하며 기존의 경인철도인수조합(京仁鐵道引受組合)을 개편하여 설립한 철도 회사로서,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여 경성과 인천 간의 철도권을 확보하려는 일본의 전략이 숨어 있었다. 경인철도합자회사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후 4월에 기공식을 한 뒤 9월 18일 서울과 인천 사이의 철도를 개통시키고 관리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종이 외세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서울과 인천 사이의 철도를 개통하기 위해 1896년(건양 1, 고종 33) 3월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부여하였다(『고종실록』 33년 3월 29일). 당시는 아관파천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약해진 상황이어서 고종은 미국인 모스에게 부설권을 준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미국공사로 활동한 알렌의 영향이 컸다.

모스는 1897년 3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자금 부족으로 철도 부설권을 일본인이 주축이던 경인철도인수조합에 매각했다. 경인철도인수조합은 1897년 5월 4일 설립되었다. 일본 정부는 경부철도 부설에 박차를 가하던 와중에 경인철도와 연결시켜 대한제국 침략을 본격화시키기 위해 부설권을 매득했다. 일제는 경부선 부설에 이어 경인선 부설권까지 획득하면서 한반도에서 정치, 군사, 경제적인 부분에 걸쳐 러시아를 상대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러일전쟁 시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은 경인선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전선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조직 및 역할

1896년 7월 17일 농상공부(農商工部) 협판(協辦)이채연(李采淵)을 경인철도사무(京仁鐵道事務)로 임명하여 경인선 부설을 관리하였다. 경인선이 부설된 인근의 토지는 부평군·과천군·시흥군 등에 산재했으며, 이 지역은 세금이 감면되었다. 1899년 경인선 개통 당시 노선상의 역은 7개였고, 1시간 30분을 소요하며 하루에 2회 왕복 운행되었다. 1900년 7월 8일 한강철교가 완공되고, 11월 12일 철도 개통식을 거행하자 서울과 인천 간 철도가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다(『고종실록』 37년 11월 12일). 반면 한강을 이용하여 인천과 용산을 오가던 전통적인 항로는 쇠퇴하였다.

변천

1900년(광무 4)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철교가 완성되고, 1901년(광무 5) 8월 21일에 경부철도가 기공되었으며, 1903년(광무 7) 11월에는 경부철도주식회사(京釜鐵道株式會社)가 경인철도합자회사(京仁鐵道合資會社)를 매수하여 경부선과 경인선을 소유하게 되었다. 일제는 러일전쟁을 준비하며 경인선을 경부선에 연결시켜 군사 작전의 반경을 확대하고 보급선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였다. 1905년(광무 9) 5월 25일 경부철도 개통식에는 일본의 히즈야스왕[博恭王]이 참석할 정도로 한반도 철도에 대한 일제의 관심이 높았다(『고종실록』 42년 5월 25일). 1906년(광무 10) 2월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에는 경인선과 경부선 철도는 경부철도매수법에 따라 통감부 철도관리국으로 넘어갔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경인철도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으로 이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주한일본공사관일기(駐韓日本公使館日記)』
  •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
  • 조선총독부, 『조선철도사』, 1937.
  • 정재정, 『일제침략과 한국철도』(서울대학교 한국사 연구총서 6),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 이노우에 유이치, 석화정·박양신 옮김, 『동아시아 철도 국제관계사』, 지식산업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