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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중심 시가지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김해부(金海府)는 금관가야(金官伽耶)의 도읍이 있던 곳으로서, 신라금관군(金官郡)에서 기원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에는 신라 5소경 중 한 곳인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편제되었고, 신라 경덕왕 때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개명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김주(金州)가 되었으며 2곳의 속군(屬郡)과 3곳의 속현(屬縣)을 거느리는 지역 중심지로 편성되었다.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김주는 김해부가 되었으며, 조선 건국 후인 1413년(태종 13)에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로 개정되고 김해도호부사가 파견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김해부에 대한 연혁은 거의 변동이 없다. 1895년(고종 32)에 김해부는 김해군으로 개칭되었다. 김해군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로 계승되었다. 조선시대 김해부의 중심지는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시 중심 시가지 지역에 위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김해부는 옛 금관가야의 도읍이 위치했던 곳이다. 신라 532년(신라 법흥왕 19)에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면서 금관군이 되었고, 680년(신라 문무왕 20)에 금관소경이 되었다. 경덕왕 때에는 김해경 즉 김해소경으로 개칭하였다. 김해경은 고려에 들어와서 940년(고려 태조 23)에 김해부가 되었고, 이후 임해현(臨海縣)·임해군(臨海郡)이 되었다가 995년(고려 성종 14)에 김주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되었다. 1012년(고려 현종 3)에 김주로 변경되었다. 『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고려시대 김주는 의안(義安)·함안(咸安) 2개의 속군과, 칠원(漆園)·웅신(熊神: 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일대)·합포(合浦) 3개의 속현을 거느렸다. 김주는 1270년(고려 원종 11)에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가 되었다가, 1293년(고려 충렬왕 19)에 김녕현이 되고,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김주목으로 승격하였지만, 1310년에 다시 김해부가 되었다. 조선 건국 후인 1413년에는 김해도호부로 정비되었다.

조직 및 역할

김해부는 금관가야의 도읍이었다가 532년에 신라에 합병된 이후부터 신라의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5소경 중 하나로 중시되었다. 680년에 금관소경이 되었다가 경덕왕 때 김해소경이 되었다. 김해소경은 9주 중 양주(良州) 관내에 속했으며, 별도의 영현(領縣)을 거느리지는 않았다. 김해소경에는 지방관으로 사신(仕臣) 혹은 사대등(仕大等)이 임명되었으며, 사신을 보좌하기 위하여 사대사(仕大舍) 혹은 소윤(少尹)이 임명되었다.

김해부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2곳의 속군과 3곳의 속현을 거느리는 지역 중심지로 중시되었다. 고려시대에 김주는 여러 차례의 개명과 읍격 변동이 있었으나 김주로 불리던 시기가 가장 길었고, 고려후기에는 김해부가 되었다. 김주일 때는 지김주사(知金州事), 김해부일 때는 지김해부사(知金海府事)가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김해도호부 즉 김해부가 되어 김해도호부사 즉 김해부사(金海府使)가 임명되었다. 고려시대 김해에는 지주사(知州事)나 지부사(知府事)가 근무하는 외관청(外官廳)과 별도로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김해부사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김해부에 종3품의 도호부사(都護府使)와 종6품의 교수(敎授)가 파견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김해부에는 종3품의 문관(文官)이나 무관(武官)이 도호부사로 임명되었는데, 도호부사는 종2품의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으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군관(軍官) 150명, 인리(人吏) 58명, 지인(知印) 16명, 사령(使令) 21명, 군뢰(軍牢) 20명, 관노(官奴) 20명, 관비(官婢) 17명이 편성되었다. 19세기의 자료인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김해에 종3품의 도호부사가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김해의 호수가 1,290호, 인구는 6,642명으로 나와 있으며, 김해의 관할하에 있던 웅신과 완포 두 속현의 호수와 인구는 각각 63호와 37호, 318명과 179명으로 기록되었다. 『여지도서』에는 1759년(영조 35)에 김해부의 호수가 8,511호, 인구는 33,015명으로, 그중 남자가 13,846명이고 여자가 19,979명이라고 기재되었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자료인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김해에 20개의 면과 205개의 리가 기재되었으며, 호수는 9,107호, 인구는 35,833명으로, 남자는 15,750명, 여자는 20,083명이었다. 1910년(순종 4)의 조사 내용인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에 따르면 김해의 호수는 16,322호이고 인구는 81,835명으로, 그중 남자가 43,444명, 여자가 38,391명이라 기록되었다. 조선시대 김해부의 읍치와 관아는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서상동·부원동 일대에 위치하였다.

변천

1413년(태종 13)에 김해도호부의 성립 이래 조선시대 김해부에 대한 연혁은 거의 변동이 없다. 1895년에 23부제의 운영 시에 김해부는 김해군이 되어 진주부의 관할에 속하였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김해군은 경상남도 관할의 2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