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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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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부도통 |
한글표제 | 부도통 |
한자표제 | 副都統 |
동의어 | 머이런 어전([梅勒額眞], meiren i ejen), 머이런 장긴([梅勒章京], meiren i janggin) |
관련어 | 기(旗, [gūsa]), 팔기제(八旗制)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중국 |
시대 | 청/조선 |
왕대 | 청/조선 |
집필자 | 이선애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부도통(副都統)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24년 12월 19일, 『숙종실록』 37년 3월 16일, 『순조실록』 3년 10월 13일, 『고종실록』 22년 4월 20일, 『영조실록』 25년 6월 12일, 『정조실록』 23년 12월 24일, 『순조실록』 3년 9월 2일, 『고종실록』 8년 1월 28일, 『순조실록』 12년 3월 24일, 『순조실록』 12년 4월 18일 |
청 팔기제의 근간을 이루는 기[gūsa, 旗]의 지휘관인 구사 어전([固山額眞], gūsa ejen )의 부장(副將).
개설
부도통은 머이런 어전([梅勒額眞], meiren i ejen), 머이런 장긴([梅勒章京], meiren i janggin)의 한어 명칭이다. 만주, 몽골, 한인 팔기의 각 기를 이끄는 구사 어전의 아래에 좌우 1명씩을 두었다. 이후에는 각지에 행정을 전담하는 장군(將軍)이 파견된 경우, 부도통을 두어 군사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부도통은 일반적으로 정2품 관원으로 장군의 절제를 받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팔기제(八旗制)로 잘 알려진 후금(청)의 군제는 평시의 생활과도 밀접한 연관을 지닌 공동체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각 기(旗), 즉 구사(gūsa)는 깃발과 테두리에 두른 색의 차이로 구분하였다. 가장 상위의 기에서부터 아래의 니루([牛彔], niru)에 이르기까지 수직적인 편제를 가지고 있었다. 청의 세력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각 구사의 지휘관인 도통 외에도 그를 보좌할 관원이 필요해지면서 머이런 어전이라는 관직을 두게 되었다. 부도통이라는 관제는 만주식 제도를 한식 제도로 고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이렇게 체계화된 계통을 수립함으로써 만주족은 몽골, 한인 등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조직을 통제할 수 있었다.
조직 및 역할
부도통은 만주, 몽골, 한인 팔기에 모두 있었다. 하나의 기에는 5개의 잘란([甲喇], jalan), 하나의 잘란에는 5개의 니루가 있었고 하나의 니루는 약 300여 명의 군사를 구성되었다고 하는데, 경우에 따라 규모나 편제의 차이는 있었다. 부도통은 도통 아래에서 그를 보좌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각 구사의 좌익과 우익을 영솔하였다.
청대에 부도통은 외지와 내지로 나누어 파견되었다. 외지로는 심양[盛京] 일대의 성경(盛京)·금주(錦州)·웅악(熊岳)·금주(金州)·흥경(興京) 등 5명, 길림 일대의 영고탑(寧古塔)·백도눌(伯都訥)·삼성(三姓)·길림(吉林)·아륵초객(阿勒楚喀)·납림(拉林)·훈춘(琿春) 등 7명, 흑룡강 일대의 묵이근(墨爾根)·제제합이(齊齊哈爾)·포특합(布特哈)·호란(呼蘭)·호륜패이(呼倫貝爾)·통긍(通肯) 등 7명, 신강(新疆) 일대의 이리(伊犁)·탑이파합태(塔尔巴哈台), 오로목제(烏魯木齊) 등 3명이 있었다. 내지에는 직예주방(直隶駐防)·밀운(密雲)·산동주방(山東駐防)·태원(太原)·차하르[察哈爾]·귀화성(歸化城)·수원성(綏遠城)·강녕(江寧)·경구(京口)·복주(福州)·항주좌익(杭州左翼)·항주우익(杭州右翼)·형주좌익(荊州左翼)·형주우익(荊州右翼)·성도(成都)·광주(廣州)·서안(西安)·양장(凉庄)·영하좌익(寧夏左翼)·영하우익(寧夏右翼) 등 20명의 부도통이 있었다. 이들은 각지 행정 장관의 절제를 받으며 군사적인 문제를 관장하였다.
숙종대를 전후하여 조선은 심양[盛京]과 영고탑의 장군 및 부도통의 통제를 받는 경우가 많았고, 육진 가운데 경원(慶源)의 대안에 있는 훈춘부도통도 영향을 주었다(『숙종실록』 24년 12월 19일)(『숙종실록』 37년 3월 16일)(『순조실록』 3년 10월 13일)(『고종실록』 22년 4월 20일). 조선에 오는 사신들 가운데 부도통 직함을 가지고 오는 경우도 잦았다(『영조실록』 25년 6월 12일)[『정조실록』 즉위년 8월 18일 정사 1번째기사](『정조실록』 23년 12월 24일)(『순조실록』 3년 9월 2일)(『고종실록』 8년 1월 28일).
1812년에는 홍경래의 난을 보고 받은 성경장군(盛京將軍)이 웅악의 부도통녹성(綠成)을 봉황성으로 보내어 주둔하면서 조선의 토벌을 받은 잔당이 압록강을 넘어 들어오는 것에 대비하게 하였다(『순조실록』 12년 3월 24일). 이때 홍경래의 난은 이미 진압이 된 상황이었지만, 조선은 안주목사를 녹성에게 보내어 접대하기도 하였다(『순조실록』 12년 4월 18일).
변천
본래 부도통의 명칭은 머이런 어전으로 팔기에서 도통 다음의 관직이었다. 1634년에는 머이런 장긴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순치 연간인 1660년에는 한자식 명칭인 부도통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은 청말까지 주요 군직으로 기능하였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杉山淸彦, 『大淸帝國の形成よ八旗制』, 名古屋大學出版會,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