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계(劍契)"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차이 없음)

2017년 12월 10일 (일) 01:43 기준 최신판



조선 숙종 때 한성부에서 노비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조직.

개설

검계(劍契)는 조선 숙종 때 서울 사대부가의 노비들이 중심이 되어 양반을 죽이고 노비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만든 계 조직으로, 향도계(香徒契)가 근간이 되어 움직인 사건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84년(숙종 10) 좌의정민정중(閔鼎重)이 도성의 무뢰배들이 사사로이 검계를 만들어 훈련하는 것으로 인해 마을이 소란하니 포도청이 빨리 이들을 체포하도록 하자는 상소를 올리면서 표면화되었다(『숙종실록』 10년 2월 12일). 숙종은 포도대장신여철(申汝哲)에게 즉시 검계 조직원들을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포도청에서는 7일 만에 검계 요원 10여 명을 체포하여 심문하였다. 이들은 심문 과정에서 연루자들을 발고하지 않고 자해까지 해가면서 완강히 버텼다(『숙종실록』 10년 2월 18일).

노비들이 검계를 조직한 목적은 실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같은 사건에 대한 내용이 『연려실기술』과 『조야회통』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검계는 살략계(殺掠契) 혹은 홍동계(鬨動契)라고도 부르며, 밤에 남산에 올라 태평소를 불어서 군사를 모으는 것같이 하고, 혹은 삼각산 근처의 중흥동(重興洞)에 모여 진법을 연습하는 것같이도 하며, 혹은 피란하는 사람의 재물을 추격해 탈취하기도 하여 간혹 인명을 살해하는 일까지 있었다. 사대부인 목내선(睦來善)의 종도 계원으로 가담해 있었고, 포도청이 압수한 계원의 책자에는 양반 살육, 부녀자 겁탈, 재물 약탈 등의 조항이 적혀 있었다. 양반 살육을 특기한 것을 보면 당시 최하층 신분이었던 노비들이 신분제에 불만을 갖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검계라는 비밀 조직을 형성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검계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으나, 그들은 체포된 뒤에도 조직과 관련한 내용을 말하지 않았고, 더 이상의 주모자가 체포되지 않아 그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좌의정민정중이 어전회의에서 검계의 무뢰배들이 주로 향도계에 근원을 두고 있으니 향도계를 모두 폐지하고 그 도가(道家)를 허물어서 폐단의 근원을 끊어 버리자고 건의한 데서 그 조직과 관련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숙종실록』 10년 2월 25일). 이를 통해 검계가 마을에서 초상이 났을 때 상여를 지는 등 상부상조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조직된 향도계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향도계의 일원으로 들어가기는 쉬웠고, 대부분이 천민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므로 조직을 은폐하기에 유리하였다.

변천

조정에서는 민정중의 건의에 따라 향도계를 폐지하는 대신 향약법을 통해 도성의 장례 풍습을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을 한성판윤에게 조사하도록 하였다(『숙종실록』 10년 3월 22일). 그러나 도성 백성들이 새로운 향약법 실시를 싫어하여 한성부에서는 향도를 따로 뽑아서 군정(軍丁)에 충당하는 방법으로 바꾸었다. 이후 1689년(숙종 15) 남인 목내선은 향도계에서 상여 메는 인력으로 보유한 유대군(留待軍) 보유를 금할 것을 건의하였다(『숙종실록보궐정오』 15년 11월 4일). 그 이유는 노론의 김석주(金錫冑)·김익훈(金益勳)·이사명(李師命)의 노비들이 향도계에 많이 들어 있어, 나중에 힘을 모아 난을 일으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조야회통(朝野會通)』
  • 정석종, 『조선후기 사회변동연구』, 일조각, 198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