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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강서현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강서현(江西縣)은 고려시대 1136년(고려 인종 14)에 설립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정5품의 현령이 고을을 다스렸으며, 임진왜란 때 선조가 강서현 행궁에서 머무르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평양부 강서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강서현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평양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했던 서경기(西京畿) 4도를 해체하고 6개의 현으로 분리할 때 설립되었으며, 강서현령이 일대를 관할하였다. 다른 이름으로 무학(舞鶴)이라고도 불렀다.

조직 및 역할

강서현은 고려시대에 처음 설치할 때 종5품의 현령을 두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현령과 훈도(訓導) 각 1인을 두었으나 이후에 훈도를 폐지하였다. 종5품의 현령은 지방행정관서인 현의 책임자로 수령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종9품의 훈도는 교관으로 지방 향교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강서현령은 평안도관찰사의 관할하에 있는 동반 외관직으로 평양진관(平壤鎭管)에 소속되었다. 조선후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소속 관원으로는 좌수 1명, 별감 2명, 도감 5명, 중군 1명, 집사 4명, 천총 1명, 파총 5명, 초관 22명, 기패관 11명, 행수 2명, 병방 4명, 도감 3명, 감관 2명, 아전 47명, 통인 30명, 서원 12명, 사령 23명, 군뢰 23명, 관노 34명, 관비 30명과 각 고을의 장인 65명을 두었다.

변천

강서현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평양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했던 서경기 4도를 해체하고 강동(江東), 강서(江西), 중화(中和), 순화(順和), 삼등(三登), 삼화(三和)의 6개 현으로 분리할 때 이악(梨岳), 대구(大垢), 갑악(甲岳), 각묘(角墓), 독촌(禿村), 증산(甑山) 등의 고을을 합쳐서 강서현을 만들고 현령을 두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1394년(태조 3)에 강서현에 포함되었던 증산 지역을 떼어 내 따로 현령을 두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강서현 행궁에 잠시 머무르기도 했다(『선조수정실록』 26년 7월 1일). 1895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평양부 강서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이존희, 「조선초기의 수령제도」, 『역사학보』30·31 합집,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