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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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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대흥군 |
한글표제 | 대흥군 |
한자표제 | 大興郡 |
상위어 | 충청도(忠凊道) |
동의어 | 임존성(任存城), 금주(今州), 임성(任城) |
관련어 | 대잠도(大岑島)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임용한 |
폐지 시기 | 1914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대흥군(大興郡)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21년 7월 3일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대흥군(大興郡)은 조선시대의 충청도 홍주목에 속한 현이다. 조선 1407년(태종 7) 군으로 승격하였으나 1413년(태종 13)에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경국대전』 편찬 당시까지 유지되었다. 15세기에는 호수가 388호, 인구 1,518명의 작은 현이었다. 토지는 3,026결인데, 논이 1/3이었다. 인구에 비해 군액은 많아 200명이나 되었다. 이 중 시위군(侍衛軍) 11명, 진군(鎭軍) 89명, 선군(船軍) 100명이었다. 조선후기에 군으로 승격하였고, 1914년에 예산군 대흥면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대흥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임존성(任存城)이었다. 금주(今州)라고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는 940년(고려 태조 23)의 지방제도 개혁 때 대흥으로 개명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지금의 홍성 지역인 운주(運州)의 속현으로 삼았다. 1170년(고려 명종 2)에 전국적으로 감무를 설치할 때 이 지역에도 감무를 두었다. 삼국시대에 임존성은 흑치상지가 지도한 백제 부흥군의 거점이었다.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육상과 해상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고, 조선후기까지 이 지역은 무(武)를 숭상하는 기풍이 남아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인구에 비해 군정이 많았다. 대흥의 행정구역은 육지만이 아니라 대잠도 등 바다에 있는 섬까지 포함하였다. 대잠도에는 중국 당나라의 무장인 소정방의 사당이 있는데, 고려시대에는 사신을 보내 제사를 지냈고, 조선시대에는 수령이 제사를 지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전기에는 종6품 현감을 두었다. 군으로 승격한 후에는 종4품 군수를 파견하였다. 문과, 음서, 무과 출신을 골고루 배정하는 지역이었다. 관속은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20명, 아전 52명, 지인 15명, 관노 11명, 관비 9명, 사령 29명이었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는 1588년(선조 21)에 군으로 쓰인 기사가 나온다(『선조실록』 21년 7월 3일). 그러나 『여지도서』에는 1681년(숙종 7)에 현종의 태실이 있다는 이유로 군으로 승격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에도 대흥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에는 8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 의하면, 편호가 3,214호, 남자가 5,000명 여자가 8,106명이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토지는 밭이 2,462결 92부, 논이 1,310결 12부였다. 1914년의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예산군으로 병합되어 대흥면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예산군지(禮山郡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