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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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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구례현 |
한글표제 | 구례현 |
한자표제 | 求禮縣 |
상위어 | 전라도(全羅道) |
동의어 | 구차례(仇次禮), 봉성(鳳城) |
관련어 | 배목인(裵目仁), 문빈(文彬), 전찬문(田贊文), 강명좌(姜明佐)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정성일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구례현(求禮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연산군일기』 4년 10월 8일, 『연산군일기』 8년 11월 3일, 『연산군일기』 9년 11월 23일, 『중종실록』 2년 4월 11일, 『고종실록』 6년 6월 8일, 『세조실록』 1년 9월 11일, 『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
전라남도 구례군에 설치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1143년(고려 인종 21)에 구례현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09년(태종 9)에 구례현이 관할해 오던 2소 2부곡을 폐지하여 구례현에 편입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 1455년(세조 1)에 구례현이 남원도(南原道)의 중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구례현이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남원진에 속했다. 1498년(연산군 4)에 배목인(裵目仁) 등이 일으킨 역모 사건으로 구례현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1499년(연산군 5)에 구례현이 폐지되어 남원부 소속이 되었다. 1507년(중종 2)에 구례현이 다시 설치되었다. 1869년(고종 6)에는 광양현 변란에 구례 사람이 연루되었다 하여, 구례현감을 여러 현의 맨 끝자리로 강등시켰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구례현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고려초에 구례현을 남원부에 소속시켰으며, 1143년에 구례현에 감무를 둔 것으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구례현이 관할해 오던 2소 2부곡이 폐지되어 담양부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2소는 남전(南田)과 방광(放光)이며, 2부곡은 사등촌(沙等村)과 유곡(楡谷)이다. 1413년에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구례현에 종6품 현감(縣監)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현감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구례현감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현감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감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변천
1498년에 배목인과 문빈(文彬) 등이 연산군의 폭정을 비난한 것이 역모를 꾸민 것으로 간주되어 구례현 폐지를 놓고 조정에서 논의가 있었다(『연산군일기』 4년 10월 8일). 『증보문헌비고』에는 1499년에 구례현을 폐지하여 남원부에 소속시켰다. 1502년(연산군 8)에는 방어에 중요한 곳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구례현의 복구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연산군일기』 8년 11월 3일). 1503년(연산군 9)에도 관부(官府)가 멀리 남원에 있어서 구례 백성들이 크게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복구를 건의하였으나 폐지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연산군일기』 9년 11월 23일). 1507년에 가서야 구례현이 다시 설치되었다(『중종실록』 2년 4월 11일). 1869년에는 광양현 변란에 구례 거주 전찬문(田贊文)과 강명좌(姜明佐)가 연루되었다 하여, 구례현감을 여러 현의 맨 끝자리로 강등시켰다(『고종실록』 6년 6월 8일).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이때 구례를 전라도 남원도의 중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구례는 남원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조선후기에는 남원거진이 전라좌영(全羅左營)으로 바뀌었다. 좌영(左營)의 속읍은 남원·곡성·장수·창평·옥과·구례·운봉 7곳이며, 좌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2초(哨), 속오(束伍) 34초, 표하군(標下軍) 287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492명으로 되어 있다.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구례현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북도는 수부(首府)를 전주에 두었으며, 구례군을 비롯한 15개 군으로 편성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구례군지』, 구례군지편찬위원회, 2005.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