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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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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곤양군 |
한글표제 | 곤양군 |
한자표제 | 昆陽郡 |
관련어 | 곤명(昆明), 곤남(昆南), 철성(鐵城), 곤산(昆山)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조선 |
왕대 | 고려~조선 |
집필자 | 정요근 |
폐지 시기 | 1914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곤양군(昆陽郡)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년 3월 27일 |
고려시대의 곤명현에서 기원하여 오늘날까지 현재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곤양군(昆陽郡)은 고려시대에 설치된 곤명현(昆明縣)에서 기원한 곳이다. 고려시대에 곤명현은 진주(晉州)의 속현(屬縣)으로 편제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소속 관계의 변화가 없다가, 1419년(세종 1)에 남해현(南海縣)과 통합하여 곤남군(昆南郡)이 되었다. 이후 1437년(세종 19)에 남해현이 독립하였으나, 그 대신 진주 금양부곡(金陽部曲)을 병합하여 곤양군이 되었다. 곤양군은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다가 1914년에 사천군(泗川郡)에 병합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곤양군의 전신은 고려시대의 곤명현이다. 곤명현은 1018년(고려 현종 9)에 진주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곤명현은 1419년(세종 1)에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육지로 옮겨 온 남해현을 통합하여 곤남군이 되었다(『세종실록』 1년 3월 27일). 1437년(세종 19)에 남해현이 분리되고 그 대신 진주 금양부곡을 병합하여 곤양군으로 개명하였다.
조직 및 역할
고려시대에 곤명현은 진주의 속현이었다. 곤명현에는 중앙에서 별도의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으며, 진주에 파견된 지방관이 곤명현을 관할하였다. 당시 곤명현에는 별도로 읍사(邑司)를 설치하여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었다. 1419년에 곤명현이 진주로부터 독립하고 남해현을 통합하여 곤남군이 되면서 최초로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그런데 현이 아니라 군으로 읍격이 정해진 데에는 이곳이 세종의 태를 안치한 장소라는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곤양군에는 종4품의 군수(郡守)와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의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곤양에는 4품의 무관(武官)이 군수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50명, 인리(人吏) 32명, 지인(知印) 15명, 사령(使令) 20명, 관노(官奴) 7명, 관비(官婢) 6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4품의 군수가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변천
1437년(세종 19)에 곤양군이 성립한 이후, 조선시대에 곤양군의 연혁은 거의 변동이 없다. 단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사천에 병합되었다가 곧바로 복구되어 진주부(晉州府) 소속의 곤양군이 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곤양군은 경상남도 소속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1914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사천군에 흡수되었다. 현재는 경상남도 사천시 소속의 곤양면으로 명맥이 이어진다. 조선시대에 곤양군의 관아가 위치했던 곳은 현재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 성내리 일원이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