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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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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강호막부 |
한글표제 | 강호막부 |
한자표제 | 江戶幕府 |
동의어 | 에도막부[江戶幕府],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 |
관련어 |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무가정권(武家政權),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일본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노영구 |
폐지 시기 | 1867년(고종 4)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강호막부(江戶幕府) |
근세 일본의 도쿠가와씨〔德川氏〕가 에도[江戶], 오늘날의 도쿄에 수립한 무가정권(武家政權)으로 일명 도쿠가와막부.
개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1603년 에도에 막부를 열고 이후 265년간 일본을 통치하였다. 에도막부는 우월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전의 여러 막부보다 일본 전국을 강력하게 통제하였으나 1854년 미국의 강압에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막부의 정치적 지위와 위치는 위태로워졌다. 이에 곳곳에서 막부의 반대파가 등장하여 막부를 압박하자 1867년 결국 통치권을 천황에게 넘기고 에도막부는 막을 내렸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하고 1599년 일본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하자 도요토미 정권 아래서 오대로(五大老)로서 최고 지위에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외교와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이 지위를 이용하여 여러 다이묘[大名]와의 관계를 강화해 나갔다. 이에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 히데요시의 은혜를 중시하던 사이고쿠[西國] 계통의 다이묘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1600년 이시다 미쓰나리가 군사를 일으키자 다이묘들은 동서로 나뉘어 100,000여 명이 세키가하라에서 결전을 벌였다. 여기서 동군의 도쿠가와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일본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세력에 가담한 다이묘를 처벌하거나 그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자신을 지지한 다이묘에게 그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1603년 일본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지위에 임명되고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 에도막부는 이후 15대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1867년 11월 천황에게 정권을 반환할 때까지 265년간 계속 유지되었다.
조직 및 역할
에도막부는 절대적 지배자인 쇼군이 막부를 장악하고 그 아래 여러 다이묘의 번(藩)이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그 자치권은 제약이 많았는데, 예를 들어 그들의 영지(領地)는 형식적으로 쇼군에게서 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쇼군이 바뀔 때마다 주인장(朱印狀)이라는 확인서를 받게 하였다. 실질적으로도 에도막부는 국토와 인민을 검지(檢地)에 의하여 일원적으로 파악한 위에 일본 전국의 30,000,000석의 토지 중 40,000,000석과 전국의 주요 광산 및 교토·오사카·에도 등 주요 도시를 직할하는 경제력과 함께 요충지에 배치되었던 막부 직할 군단의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통치력을 가지고 있었다.
막부의 행정조직은 제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실권을 잡은 1630년대 이르러 확립되었다. 1634~1638년에 걸친 행정조직 개편 결과 통치 기구상의 각 관원의 권한의 범위와 직무 내용을 명확히 하였다. 이에 의하면 최고 직위로서 다이로오[大老]가 있고 그 아래 5명의 로오쥬우[老中], 로오쥬우의 보좌역으로 막부 직할 군단의 지휘관이었던 3∼6명의 와카 도시요리[若年寄]가 있었다. 행정 분담 기관으로는 사원과 신사(神社) 관계를 맡은 지샤부교오[寺社奉行], 막부직할령과 막부 재정을 맡은 간죠오부교오[勘定奉行], 에도의 행정을 맡은 에도마치부교오[江戶町奉行] 등이 있었다. 이외에 지방의 직할령을 관리하는 여러 관원이 임명되었다. 막부의 행정조직은 쇼군과 로오쥬우의 계열 밑에 직무 내용을 명확히 한 각 직책이 배치된 형태로 확립되었다.
변천
에도막부는 국내적으로 강력한 통치력을 확보하였고 외교도 일원적으로 장악하여 기독교를 금지함과 함께 쇄국정책(鎖國政策)에 의하여 외국와의 자유로운 교통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는 부분적인 개혁을 이루었지만 일본 국내의 상품화폐경제의 발전과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럽 세력에 의한 외부적 압력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개혁에도 실패하였다. 1853년 페리제독이 이끈 4척의 미국 군함의 압력에 굴복하여 이듬해 3월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강제로 개국하게 되자 막부의 정치적 지위와 위치는 위태로워졌다. 이에 곳곳에서 막부의 반대파가 등장하고 이를 막부가 진압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졌다. 1867년 7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중심으로 한 도사[土佐]의 사무라이들이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압박하여 쇼군에서 물러나 일개의 다이묘로 돌아오고 통치권을 천황에게 넘길 것을 요구하였다. 그해 11월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통치권을 천황에게 바치면서 에도막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민두기, 『일본의 역사』, 지식산업사, 1976.
- 아사오 나루히로 외(이계황 외 역), 『새로쓴 일본사』, 창비, 2003.
- 피터 두으스(김용덕 역), 『일본근대사』, 지식산업사, 198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