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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2 기준 최신판



마을의 복리증진과 상호부조를 위하여 공유재산을 마련하고 규약을 제정한 자치 조직.

개설

동계(洞契)는 동약(洞約), 이계(里契), 이약(里約)이라고도 한다. 발생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주자학과 향약이 전래되는 고려말~조선초로 추정된다. 마을을 단위로 조직되어 구성원의 복리증진과 상호부조를 위한 기능을 수행한 자치 조직이었다.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와 유교 중심의 사회윤리에 입각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문화의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흔히 ‘향약(鄕約)’으로 분류되고, 엄격한 의미에서 이전이나 동시대의 다른 자치 조직과 구분되었다. 즉, 신라~고려의 자치 조직이나 조선시대의 농민 중심의 자치 조직인 촌계(村契)나 향도(香徒)와는 구분된 것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동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16세기이다. 이때 재지양반은 고을 지배를 위해 각종 장치를 마련하면서,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촌락 지배를 위하여 동계를 조직하여 길흉과 환난시 상부상조를 표방하였다. 반촌(班村)과 그 영향력 아래에 있는 민촌(民村)을 포괄하는 여러 개의 촌락을 단위로 하였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상인(上人)과 하인(下人) 모두를 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반촌·상인을 대상으로 하는 상계(上契)와 민촌·하인을 대상으로 하는 하계(下契)가 위계적으로 공존하였다. 그러므로 동계의 설립 목적과 운영 주체는 양반이었던 것이다.

조직 및 담당 직무

동계를 운영하려면, 크게 규약, 재산, 임원, 계소가 있어야 하였다. 규약은 계의 회의, 재산의 운용, 임원의 선정, 농업 노동의 동원, 경제예속과 신분질서 및 유교예속(미풍양속)의 저해 사범에 대한 처리 등을 담고 있다.

재산은 혼인과 상사에 필요한 도구로서 그릇, 상여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상호부조를 위한 곡물을 그때그때 수합하거나, 기금을 마련하여 그 이식으로 조달하거나, 토지를 마련하여 그 소출로 조달하였다. 이 외에 동계소가 회의소로 있었고, 동계를 운영하고 집행하는 임원도 선임되었다.

변천

임진왜란으로 향촌 사회는 크게 황폐해졌고 양반들의 세력 조직도 붕괴되었다. 양반들은 전후 복구를 추진하면서 이전의 상계와 하계를 합계(合契)하여 동계를 복구하였다. 따라서 동계의 성격과 운영이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포와 환곡이 촌락 단위로 부과되어 공동납(共同納)이 등장하였다. 이때 그 세금을 동계를 통해서 마련하여 납부한 마을이 생기게 되었다. 어떤 동계는 촌락의 산림을 보호하기 위하여 송계(松契)를 겸하기도 하였다. 또한 하층민의 반발로 계가 쪼개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양반 중심의 조직에서 전 구성원의 공동체 조직으로 변화되어 가던 동계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기에도 새로이 등장하여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의의

동계는 성리학 수용 이후 양반층의 결속과 신분적 차별성 및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촌락 내 하층민을 적절하게 통제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그러나 점차 촌락 공동체 성격을 갖는 조직으로 변화하면서 오늘날까지 비록 명맥이나마 이어오고 있다.

참고문헌

  • 정진영, 『조선시대 향촌사회사』, 한길사, 1998.
  • 향촌사회사연구회, 『조선후기 향약연구』, 민음사, 1990.
  • 박경하, 「조선중기 향촌지배조직에 관한 연구」, 『국사관논총』 59, 1994.
  • 이해준, 「조선후기 영암지방 동계의 성립배경과 성격」, 『전남사학』 2,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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