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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1 기준 최신판



신라시대에 기원하여 오늘날까지 현재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고령(高靈)은 원래 대가야국(大伽倻國)의 도읍이었으나, 신라가 대가야를 정복하고 고을을 신설하였다. 고령이라는 명칭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사용하였는데, 당시 고령군이라 칭하고 영현(領縣) 두 곳을 거느렸다. 고려 때도 고령군이 되어 경산부(京山府: 현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일대) 소속의 속군(屬郡)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고령군은 고령현으로 변경되었는데 변경 시점은 불명확하다. 1175년(고려 명종 5)부터 감무(監務)가 파견되기 시작하였으며, 감무는 조선시대에 현감(縣監)으로 개칭되었다. 고령현은 조선시대에 거의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되다가, 1895년(고종 32)에 고령군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령현은 원래 대가야국의 땅이었다. 562년(신라 진흥왕 23)에 신라가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대가야군(大加耶郡)을 세웠으며, 경덕왕 때 고령군으로 개명하였다. 고령군은 신라 9주(九州) 중 강주(康州)에 소속되었으며, 야로현(冶爐縣)과 신복현(新復縣) 2개의 영현을 거느렸다. 고려시대에도 변함없이 고령군이라 하였으며, 경산부 소속의 속군(屬郡)이 되었다. 1175년(고려 명종 5)에 감무가 처음으로 파견되었는데, 고령군에서 고령현으로 변경된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13년(태종 13)에 기존의 감무를 현감으로 개칭하였다.

조직 및 역할

신라시대에 고령군에는 외관으로 태수(太守)가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고령군이 경산부의 속군으로 기능하였다. 비록 고려시대에는 중앙에서 고령에 지방관을 파견하지는 않았지만, 고령에는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지경산부사(知京山府事)의 관할하에 있었다. 고령군은 고려시대에 고령현으로 개명되었으며, 1175년에 감무가 처음 파견되었다. 이후에도 지방관이 계속 파견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1413년부터 감무 대신 현감이 파견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령현에는 종6품의 현감과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의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고령에는 종6품의 음관(蔭官)이 현감으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30명, 인리(人吏) 30명, 지인(知印) 14명, 사령(使令) 12명, 관노(官奴) 21명, 관비(官婢) 6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6품의 현감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변천

조선시대에 고령현의 연혁은 거의 변동이 없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대구부에 속하여 고령군이 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고령군은 경상북도 소속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별다른 변동 없이 고령군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 고령현의 관아가 위치했던 곳은 현재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 일원이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