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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강계부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강계부(江界府)는 조선 태종 때 도호부로 승격된 이후 압록강 변의 여진족 침입을 막는 교두보 역할을 하였으며, 세종 때 4군을 개척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데 주요 거점이 되었다. 한반도 북부의 중앙 국경 관문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1896년(고종 33)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평안북도 강계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강계부는 압록강을 끼고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국방상 요충지로 인식되면서 창성, 위원, 이산, 벽동, 의주, 삭주와 함께 강변 7읍으로 불렸다. 조선 건국 초에 압록강 건너 거주하고 있던 여진인들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병마사(兵馬使)를 두어 관리하였다. 1432년(세종 14)에 여진족들이 압록강을 넘어 여연(閭延)으로 침입함에 따라 이듬해에 평안도절제사최윤덕(崔潤德)의 지휘 아래 여진을 정벌하였는데 전군이 강계부에서 집결하여 출발하였다. 이후 세종 때 4군을 개척하여 국경의 방비를 강화하였고, 세조 때는 일부 지역의 백성들을 강계부에 흡수하였다. 강계부는 1896년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사찬읍지인 『칠군도경(七郡圖經)』에 의하면 강계는 산과 돌이 많으며 맑은 수원이 깨끗하게 흐르고 크고 작은 물줄기가 합해진다는 의미에서 석주(石州), 청원(淸源)이라고도 불렀다.

조직 및 역할

강계부는 태종 때 종4품의 지주사를 두었다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여진족과 대치하고 있다는 북방 변경의 특수성에 맞추어 부로 승격하고, 군사와 행정을 겸비하는 종3품의 병마사를 두었다. 이어 도호부로 개편되면서 종3품의 도호부사를 두었고, 1406년(태종 6)에는 의주·이성과 함께 특별히 유학교수관(儒學敎授官)을 두었으며, 1431년(세종 13)에는 판관 1명을 두었다. 1442년(세종 24)부터 4년간은 정3품의 절제사를 두어 관할하였고, 1443년(세종 25)에는 여진족들이 자주 국경을 넘어와 식량을 요구함에 따라 강계의 만포구자(滿浦口子)에 새로 만호(萬戶)를 두어 관리하였다. 1458년(세조 4)에는 다시 종3품의 도호부사를 임명하였다. 조선초기 『경국대전』이 편찬된 당시에는 평안도에 모두 6곳의 도호부가 존재했으나 변방의 국방 강화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속대전』이 편찬될 때는 14곳으로 증대되었다. 도호부는 읍격(邑格)상 군수와 목사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군사적 성격이 강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일반 행정기구로 변화하여 전국에 설치되었으며 후기로 갈수록 그 수가 많아졌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외관직으로 종3품의 도호부사 1명과 종5품의 판관 1명을 두었으나, 『대전회통』에는 판관이 없어지고 종9품의 역학훈도 1명을 두었다. 토관직은 의주와 인원을 똑같이 배치하였는데 도할사(都轄司)에 종6품 도할(都轄) 1명과 정7품 전사(典事) 1명, 전례서(典禮署)에 종6품 감부(勘簿) 1명, 종8품 급사(給事) 1명, 종9품 섭사(攝事) 1명, 융기서(戎器署)와 사창서(司倉署)에 종7품 장사(掌事) 각 1명, 섭사 각 1명, 전주국(典酒局)에 급사 1명, 섭사 1명, 사옥국(司獄局)에 섭사 1명을 두었다. 토관직은 지방의 효율적인 행정 운영과 군사조직 강화를 위해 지역의 토착인을 임명한 특수관직으로서 강계부의 경우에는 조선후기 『대전회통』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세종 때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평안도의 의주·삭주·이산·창성·벽동·강계 등의 지방관은 모두 처자를 데리고 부임하도록 하였다. 1623년(인조 1)에 판관을 없애고, 1692년(숙종 18)에는 우방어사를 두고 위원(渭原)과 초산(楚山)을 관할하도록 했다. 조선후기에는 강계부 일대를 중심으로 백성들의 산삼 채취가 늘어나면서 나라의 주요 공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는데, 그 수량이 증가하게 되자 각종 폐단이 일어났다(『정조실록』 15년 11월 11일).

변천

강계부는 고려시대에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로 불리다가 1401년(태종 1)에 석주라고 하여 종4품의 지주사를 두었다. 1403년(태종 3)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 강계부로 승격하고 강계부병마사를 두었다. 1413년에 각 도의 단부관(單府官)을 도호부로 고칠 때 강계도호부로 승격하여 도호부사를 두었다. 1435년(세종 17)에는 이산군(理山君)의 각 리 10곳을 분할하여 강계부에 속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7년 10월 21일). 1442년에는 강계부에 절제사를 두고 도절제사영을 영변에서 강계로 옮겼으며, 4년 후인 1446년(세종 28)에는 다시 절제사영을 영변으로 옮겼다. 특히 세종 때는 여진족이 자주 압록강을 건너 침략해 와서 최윤덕과 이천(李蕆)을 평안도절제사로 임명하여 두 차례에 걸쳐 여진족을 정벌하였다. 그 결과 강계와 붙어 있는 평안도 북동부 지역에 새로이 여연, 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虞芮)의 4군을 개척함으로써 국방 경계를 강화하였다. 이후 1459년(세조 5)에는 4군의 자연지형이 방어하기에 뛰어나 진(鎭)과 보루를 설치하고 4군을 폐하여 우예·자성 2군의 백성을 강계로 옮겼으며, 1462년(세조 8)에는 강계진을 두고 이산·위원·자성을 강계부에 소속시켰다. 강계부에는 벌등진(伐登鎭), 고산진(高山鎭), 만포진(滿浦鎭), 평남진(平南鎭), 신광진(神光鎭)의 5진이 있어서 강계 방어의 전초기지를 이루었다. 1895년(고종 32)에 부군제(府郡制)의 실시에 따라 강계부는 강계·후창·자성·위원·초산·희천의 6군을 관할하게 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전국을 13도로 나누면서 평안북도 강계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육군본부, 『한국군사사』제6권, 2012.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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