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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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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권업모범장 |
한글표제 | 권업모범장 |
한자표제 | 勸業模範場 |
동의어 | 농사모범장(農事模範場), 농업모범장(農業模範場), 농사시험장(農事試驗場) |
관련어 | 평양 농림모범시험장(平壤 農林模範試驗場), 원예모범장(園藝模範場), 농림학교(農林學校), 혼다 고스케[本田幸介],통감부(統監府) |
분야 | 경제/산업/농업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대한제국기 |
왕대 | 대한제국기 |
집필자 | 목수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 |
1906년 일제 통감부가 농업 생산력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일본식 농업기술의 시험·조사 및 지도를 명목으로 설치한 기관.
개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뒤에 설치된 통감부는 대한제국의 농업 생산물을 일본 농업 구조의 체제 안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농업구조를 개편하려 하였고, 이를 지도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1906년 권업모범장을 세웠다. 이 기관은 근대적인 농법을 전파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일제의 농업정책을 수행하는 기관으로서 기능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일본에서는 제국주의 정책을 지지하기 위한 산업시설의 확충과 노동자 증가로 인한 부족한 쌀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대한제국에서 쌀 생산을 확대하고 품질을 높이도록 쌀 개량을 요구하였다. 1900년대 초부터 일본인 미곡상들이 농사시험장을 세우도록 요구하자, 1904년 러일전쟁 직후 일본의 농상무성은 동경제국대학 농과대학 및 농상무성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토지와 농산물을 조사하였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도 별도로 1904년 10월부터 농상공의 실업에 관한 학술 및 기능을 가르칠 농상공학교 개교를 준비하고, 1905년 그 실습농장을 뚝섬에 설치하고 농상공부 주관하에 대구에 농사시험장 설치계획도 세웠으나 통감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06년 4월에 「통감부권업모범장관제」가 발표되었고, 6월 15일에는 경기도 수원군 서둔평에 권업모범장이 설치되었다. 이 토지는 원래 궁내부경리원(經理院) 소관의 토지를 통감부에서 임차하고 일부 민유지를 매수한 것이었다.
이 관제에 따르면, 권업모범장은 한국 농업의 발달·개량을 위한 모범 및 시험, 물산(物産)의 조사와 농업상에 필요한 물료(物料)의 분석과 감정, 종묘·잠종·종금(種禽)·종돈(種豚) 등의 배부, 농업상의 지도·통신 및 강화(講話) 등을 관장한다. 그러나 권업모범장의 사업은 일본 농법을 우리나라에 이식하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시험·조사보다는 모범, 즉 지도·권장에 중점이 두어졌다.
1906년 권업모범장이 설립된 후 1906년 11월 사업을 변경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대한제국 정부에 이양되었고 1907년 3월 22일 권업모범장 관제가 칙령 제17호로 황제의 재가를 얻고, 5월 15일 수원에서 권업모범장 본장 개장식이 거행되었다. 1907년 4월 1일부터 한국정부의 관할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권업모범장이 통감부 하에 있어 지도·권장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와 조사를 담당하던 기사와 기수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한국정부의 촉탁형식으로 근무하였다. 1907년 정미 7조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용하게 되었고 1908년 1월 1일부터 이들은 한국의 정식 관리로 임용되었다.
조직 및 역할
권업모범장의 관원으로는 장장(場長) 1명, 기사(技師) 6명, 기수(技手) 8명, 서기 4명을 두었다. 이후 1929년경에는 기사 12명, 기수 14명으로 40명가량의 직원을 두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권업모범장에서는 산미증식 계획에 따라 시비법의 개량과 벼 품종의 개량에 대한 연구와 시험에 집중하였으며 1908년 이후 전국 각지에 시험지·출장소 등도 설치하였다. 특히 목포에 둔 출장소는 남부 지역의 면화재배사업을 감독하는 역할을 하였다. 1920년 후반에는 단위면적당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벼 품종 개량에 총력을 기울였다.
권업모범장에서는 일본식 품종 개량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한국의 전통적 농업기술을 근대화하여 발전시키기보다는 주로 일본식 농업과 공통되는 부분의 기술 이식에 집중하였다. 따라서 일본 내에서 기른 수도 신품종을 들여와 품종시험과 재배시험, 비료시험, 병충해시험 등을 함으로써 품종으로 완성하는 데에 이용하였다. 이는 권업모범장을 일본의 농업 생산 향상의 한 기구로 활용하였기 때문이었다.
변천
1910년 일제의 강점 이후 권업모범장은 조선총독부 산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1917년 전국 13개 도에 13개소의 종묘장이 설치되었다. 그 밖에 원예지장(園藝支場)·면작지장(棉作支場)·목양지장(牧羊支場)·잠업시험소 등을 각지에 설치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종자개량 등을 통해 증산에 기여하기도 했다. 1929년 9월 17일자로 권업모범장 관제가 폐지되고 칙령 제29호로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관제가 새로이 제정됨에 따라 농사시험장으로 개편되었다.
권업모범장을 설치할 1906년 당시에는 밭이 1,170평, 논이 1,446평이었으며 1906년 말까지 시설과 설비를 완성하였다. 이후 권업모범장의 사업이 증대되면서 1929년 농사시험장으로 바뀐 이후 1940년에는 5배 이상 증가한 460.68 정보로까지 규모가 확대되었다.
참고문헌
- 『대한제국 관보(大韓帝國 官報)』
- 『조선농업발달사(朝鮮農業發達史)』 정책편(政策篇), 조선농회, 1944.
- 『조선시정연보(朝鮮施政年報)』(1910∼1912)
- 농촌진흥청 편,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 보고(朝鮮總督府勸業模範場)』, 2008.
- 김도형, 「권업모범장의 설립과정과 역사적 성격」,『일제의 한국농업정책사 연구』, 한국연구원, 2009.
- 김도형, 「권업모범장의 설립과정과 역사적 성격」, 『농업사 연구』제9권 제1호, 한국농업사학회, 2010.
- 박수현, 「일제하 수원 권업모범장의 조직과 기능의 변천」, 『수원학연구』, 수원학연구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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