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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함경도단천군에 위치하여 함경남병사(咸鏡南兵使)의 지휘를 받던 봉수.

개설

함경도단천군(端川郡)은 오늘날 함경남도의 동단부에 위치한다. 동쪽은 함경북도 학성군, 서쪽은 풍산군·북청군, 남쪽은 동해, 북쪽은 갑산군 및 함경북도 길주군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1107년(고려 예종 2)에 윤관(尹瓘)이 별무반(別武班)을 이끌고 고려 동북쪽 새외(塞外)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을 몰아낸 뒤 그 지역에 9개의 성(城)을 축조했는데, 9성 중의 복주(福州)가 단천에 해당한다. 단천군은 조선시대의 5개 봉수로 중 함경도 경흥부(慶興府) 서수라보(西水羅堡)의 우암(牛巖)에서 처음 시작되는 제1봉수로가 지나는 곳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단천봉대는 조선 세종대부터 북방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단천 일대에 여러 개의 봉수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설치되었다. 그러나 단천군에 속한 여러 봉수 중 정확히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직 및 역할

단천봉대의 조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단천부(端川府) 군병(軍兵) 조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단천봉대에는 봉수별장(烽燧別張) 1명, 표하군(標下軍) 8명, 봉무사(烽武士) 700명, 이동보봉수별장(梨洞堡烽燧別將) 1명, 봉무사(烽武士) 21명이 속하였다. 그런데 이 인원은 일개 봉수에 소속된 규모로 보기에는 다른 봉수의 경우와 비교할 때 지나치게 많은 수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당시 단천부의 특정 봉수가 아니라 부에 속한 전체 봉수에 소속된 인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703년(숙종 29) 5월에 남병사(南兵使)김중기(金重器)가 단천의 봉대군(烽臺軍)이 궐직(闕直)하여 봉화를 끊었다는 죄목으로 효시(梟示)를 청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그러나 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봉화를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바로 효시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의정부의 복계(覆啓)에 따라 곤장을 치고 극변(極邊)에 충군(充軍)토록 하였다. 더불어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해당 읍의 수령도 영문(營門)에서 곤장을 치게 하였다(『숙종실록』 29년 5월 18일).

변천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단천군에는 호례(好禮)·오라퇴(吾羅退)·말흘라(末訖羅)·마운령(磨雲嶺) 등 4기의 봉수가 속해 있었다. 하지만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면, 이때를 전후하여 철폐된 호례봉수를 제외하고 총 16기의 봉수가 운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조대에 편찬된 『여지도서』에서는 함경도 단천부에 속한 봉수를 직로(直路)와 산로(山路)로 구분하여, 직로에 호타(胡打) 외 3기, 산로에 은용덕(隱龍德) 외 8기 등 총 13기만이 소개되어 있다. 『대동지지』에는 증산(甑山)·마흘내(亇訖乃)·오라퇴·호타리(胡打里) 등 4기가 기록되어 있다. 끝으로 『증보문헌비고』에는 『대동지지』에 기록된 4기의 봉수가 함경남병사의 관할 아래 있으며, 함경도 경흥 서수라 우암에서 시작되는 제1봉수로에 속한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주홍, 『북한의 봉수』, 서경문화사, 2011.
  • 김주홍, 『조선시대 봉수연구』, 서경문화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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