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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강동현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강동현(江東縣)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설립되어 조선 세종 때 삼등현에 편입되었다가 1482년(성종 13)에 다시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평양부 강동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강동현은 고려 1136년에 평양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했던 서경기(西京畿) 4도를 해체하고 6개의 현으로 분리할 때 설립되어 강동현감이 일대를 관할하였다. 다른 이름으로 송양(松壤)이라고도 불렀다. 종6품의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조선이 건국한 후 1413년(태종 13)에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현감으로 바꾸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현감과 훈도(訓導) 각 1인을 두었으나 이후에 훈도를 폐지하였다. 종6품의 현감은 지방행정관서인 현의 책임자로 수령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종9품의 훈도는 교관으로 지방 향교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현감은 평양북성영장(平壤北城營將) 성천진관(成川鎭管)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직하였다. 조선후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소속 관원으로는 좌수 1명, 별감 2명, 중군 1명, 기고관 2명, 교련관 2명, 북성기패관 10명, 아전 32명, 사령 15명, 군뢰 15명, 관노 19명, 관비 22명이었다.

변천

강동현은 고려 1136년에 평양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했던 서경기 4도를 해체하고 강동(江東), 강서(江西), 중화(中和), 순화(順和), 삼등(三登), 삼화(三和)의 6개 현으로 분리할 때 잉을사향(仍乙舍鄕), 반석촌(班石村), 박달곶촌(朴達串村), 마탄촌(馬灘村)을 합쳐 강동현을 설립하였다. 그 뒤 성천에 편입되었다가 공양왕 때 다시 감무를 두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35년(세종 17)에 고을 사람 곽만흥(郭萬興)이 현령이백선(李伯善)을 때리고 욕보였는데도 고을 사람들이 둘러서서 보고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여 삼등현에 편입시키고 치소를 삼등현 관아로 옮겼다(『세종실록』 17년 3월 10일). 이후 1451년(문종 1)에 삼등과 강동의 첫 글자를 따서 삼강현(三江縣)으로 하였다가 1482년에 다시 강동현으로 바꾸고 관아를 처음 있던 고을로 옮기었다. 1895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평양부 강동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이존희, 「조선초기의 수령제도」, 『역사학보』30·31 합집, 1982.